책과 영화

페페의 희망교육 밑줄긋기

샘연구소 2015. 9. 20. 12:02
  • 페페의 희망교육

로베르트 프란시스 가르시아 지음, 노일경 양희준 유성상 윤창국 허준 옮김,

학이시습, 2014

 

이 책은 민중교육자들(NGO, 사회운동단체의 교육·훈련 담당자)을 위한 책이다.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는데 본문은 그림과 예시를 넣어서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유머러스하게 민중교육과 PEPE를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부록은 학문적이고 철학적인 내용과 함께 필리핀 역사 속에서의 구체적인 경험과 평가, 논의들을 제시하고 있다.

(괄호안의 숫자는 책의 쪽수임) 

 

민중교육을 정의하는 일만큼 민중교육을 느끼는일도 중요합니다. (2)

 

학습자는 어디선가 만들어진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학습자는 경험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재료를 활용해 지식을 만들어내는 공동의 생산자입니다. 그러므로 민중교육에서 학습은 진화하게 됩니다. (2)

 

첫째, 민중교육은 접근하기 쉽습니다. 엘리트적이지 않고 단순하기에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겹지는 않습니다. 즐거움을 담고 있지요.

둘째, 민중교육은 특정한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민중교육은 민중을 위한 교육입니다. 다시 말해, 민중에게 봉사하는 교육이지요. 해방이요 임파워먼트입니다. 또한 진실을 섬기고 진리를 중요시합니다.

셋째, 민중교육은 민중 스스로 창조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정확하지 않다고 거짓은 아닙니다. 민중은 다양하고 많은 자원을 통해 학습하면서 결국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학습의 주체입니다. 에디시오 델라 토레 (15)

 

민중교육은

관습적인 사고양식을 비판한다.

스스로의 비판에 대해 열어놓는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성을 복원한다.

우리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상호주관성을 위한 장소이다.

비합리성의 중요성을 재인식한다.

인지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을 모두 포함한다.

창조적이며 성찰적이다.

어떠한 전체주의적 시도도 거부한다.

(17)

 

프레이리의 학생(문해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브라질 농부들)들은 전통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선택된학생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기본적인 문제를 토론하고, 궁극적으로는 집단적 행위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읽고 쓰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행위 성찰-행위의 과정이 바로 프락시스(praxis)’입니다. (33)

 

확실성 때문에 눈이 먼다는 것은 일종의 역설입니다. ‘확실성은 우리 눈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환영입니다. (중략) 어떤 하나의 원리나 지식으로 현실을 완전히 설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62)

 

민중교육은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거부해야 합니다.

(63)

 

민중교육자들은 일류 문명의 진보와 인간의 권리 회복을 위해 존중, 개방성, 관영의 분위기가 확산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64)

 

민중교육의 역할은 사람들이 자신의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볼 수 있도록 하여 개인 또는 집단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돕는 일입니다. 중략 ...

톰 로빈스는 진정한 용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당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사고를 재검토하고, 변화를 감내하며, 인식을 확장시킬 수 있도록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진정한 용기는 케케묵은 자신의 때를 벗겨내는 일이다.

(70)

 

 

맥락(Context)

누가 민중입니까? 민중이 처한 상황은 어떻습니까? 민중의 생각과 꿈은 무엇입니까? 민중의 열망은? 민중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까? 민중의 노래는, 민중의 말과 글은 무엇입니까? 민중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민중은 무엇을 먹습니까? 민중은 얼마만큼의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까?

민중의 사고방식과 태도는 어떻습니까?

교육이란 무엇입니까? 교육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습니까? 누가 가르칩니까? 학습은 어ᄄᅠᇂ게 일어납니까? 학습을 촉진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르칩니까? 기술? 사고방식(태도)? 지식?

비판적인 이해는 교육 안의 민중과 민중 속의 교육, 이 둘 간의 고나게를 올바르게 인식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민중은 어떻게 그들의 삶으로부터 배웁니까? 교육은 어떻게 민중의 삶을 변화시킵니까? 그들의 염원은 어떻게 교육의 과정, 즉 교육의 구조, 내용, 방법 등을 형성합니까? 교육은 민중과 그들의 공동체에서 도대체 무엇을 만들고 고양시키며 또 새로운 삶의 융단으로 자아내려고 하는 것일까요?

차 칼라

(79-80)

 

학습자의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교육자는 이미 가공된 지식을 전달하는 엘리트주의 교육자와 똑같아지고 맙니다. , ‘은행저축식(banking)’교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81)

 

프레이리는 민중교육자란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 문법, 의미, 그리고 이들의 꿈과 욕망 속에 표현된 세계를 진지하게 읽는 존재라고 주장합니다.

(81)

 

내용

지식은 눈에 보이는 현실과 분리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 현실과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은 학습자의 맥락에서 동화되고, 학습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과 통합될 수 있을 때에만 유용합니다. 단지 덧붙여지기만 하는 지식은 우리 몸에 침입한 외부 생물체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몸의 항체는 외부 생물체를 쫓아냄으로써 우리 몸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85)

 

방법

첫째, 우리는 학습자들이 학습과정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학습내용을 좀 더 잘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습니다.

(중략)

강의는 학습자들이 보다 깊이 생각하고, 보다 많은 질문과 답을 구하게 하는 데 적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가 대화를 자극함으로써 학습자의 성장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우리가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세 번째 이유이면서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87)

 

올더스 헉슬리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교육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교육은 지배계급이 좋아하는 교육이다.” (98)

 

크리슈타무르티의 말

우리 사회가 대부분 지성과 언어의 토대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늘 생각이 행동보다 앞선다. 따라서 행동은 관념의 시녀이다. 그러나 관념의 단순한 구성은 명백히 행동에 해롭다. 관념은 또 다른 관념을 낳는다. 그리고 관념만 양산되는 곳에서는 적대감이 싹튼다. 사회의 머리만 비대해진다. 관념이 행동을 강제할 때, 행동은 인류를 결코 해방시킬 수 없다.”

(98)

 

<부록>

 

프레이리 민중에게 헌신한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자신을 혁명적 지혜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그 지혜를 민중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낡은 방법이다.

(116)

 

누가 교육자들을 교육할 것인가?’ - 마르크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세 번째 테제에서 환경 변화에 따른 인간 활동 변화라는 관점에서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Marx, 1844~1847)) 역자 주

(128)

 

그러나 친밀감을 희생하고 엄격함을 내세운다면 두려움과 희망, 사랑과 증오, 색깔, 감촉, 향기 등의 감정과 느낌이 배제된 순수 지성 세계가 창조될 것입니다. 친밀성을 경시하는 것은 기술만능주의로 이끄는 지름길이기도 하고, 교조주의의 부활을 재촉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129)

 

교육자는 항상 추상적인 본질, 예를 들어 민중이 아닌 구체적 개별자와 공동체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138-139)

 

대화의 특징은 비종결성에 있지요. 중략...

바흐친은 전통적인 대화 모델이 대화를 살아있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봅니다. 특히 형식주의 윤리학과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에서는 비종결성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39)

 

(바흐친이 보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의사소통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140)

 

공감을 통한 감정이입을 하느니 차라리 우리는 바흐친이 말한 살아 있는 진입 (live entering)’, 혹은 또 다른 삶 안으로 들어가 살기 (living into)’가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선입견을 포기하는 동시에 이를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상호작용을 시작하며, 둘 중 누구에게도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되지요. 이를 통해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142)

 

바흐친이 누누이 지적했듯, 교조주의처럼 상대주의도 대화를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종합(synthesis)’이나 관점의 융합(merging)’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화는 자기소멸적 인공물이 아니다. 또한 대화는 변증법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헤겔 또는 마르크스적) 변증법은 단일 의식 안에 우리를 가두고 단일하면서도 독점적인 관점으로 모순을 극복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반명, ‘두 문화가 대화의 방식으로 조우하게 될 때, 각각의 문화는 자신만의 통일성과 열린 총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

(Morson & Emerson 1990:54~56)

(145)

 

 

미셀 푸코는 비판(critique)’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지요.

미판은 특정 사물을 보고 그것을 본질적으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비판은 친숙하지만 도전할 수 없었고 고려할 수 없었던 사고양식이 무엇인지 지적하는 일이다.(149) (비판은) 갈등을 드러내는 질문, 즉 갈등을 단순한 이해관계의 대립이나 제도적 고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본질적인 형태로 만드는 질문이다. 갈등, 즉 대립관계로부터 새로운 권력관계가 반드시 등장하기 마련이다. 처음에야 개혁이라는 이름을 얻겠지만 ... 만약 사고 자체에 관한 비판 작업이 없다면, 그리고 사고양식, 다시 말해 행동양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떤 개혁 프로젝트를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항상 같은 행동양식과 제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50)

 

J. 크리슈나무르티

존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유, 즉 존재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모든 사상, 감정 그리고 행위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존재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결코 멈춰 서 있지 않고, 정적이지도 않으며, 항상 움직이기 때문이다.”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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