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의 모란공원묘원에 다녀왔다.
전태일, 문익환 등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왜 그리 많은 분들이 이땅의 백성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몸을 불태우고 맞서 싸우다 죽어갔는지.. 너무나 가슴아프고 먹먹했다.
최근엔 큰 어머니 이소선, 박용길 두 분이 이곳 아들과 남편 곁에 누웠다.
흔히 한국의 여성상이라고 하면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떡썰기로 유명한 한석봉의 어머니 정도만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정말로 훌륭한 어머니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나는 이소선, 박용길 두 분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마지막 부탁으로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 데 뚫리면, 그걸 보고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의 마지막 부탁대로 사셨다.
이소선 여사는 노동자, 노동조합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청계피복 노조의 결성을 이끌어냈고, 역사 투쟁의 현장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배고프고 약한 이들과 함께 하면서 수없이 많은 구류, 연행, 단식, 농성, 가난의 길을 걸었고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념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사회운동의 전략과 기술을 익힌 것도 아니다.
젊어서 영양실조로 실명의 위기에 부닥쳤다가 새벽기도 끝에 눈을 뜨게 되면서 신앙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하루도 빼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 순박하고 오롯한 믿음이 그를 거친 길에도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박용길 여사 또한 문익환 목사님의 빛에 가리워 잘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이소선 여사와 달리 경기여학교와 일본의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를 졸업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호화스런 엘리트 상류층의 길을 택하기보다 문익환 목사와 결혼하고 올곧게 민주주의와 인권, 통일의 좁은 길을 함께 했다.
그이 역시 뜨거운 신앙의 사람이었다. 일본에서의 신학교시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압박 속에서도 새벽기도와 한국인 가정을 찾아 심방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익환 목사님의 훌륭한 길벗이요 반려자로서 수많은 민주화, 통일에의 길을 함께 걸어오셨다.
나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신 외할머니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기도를 거른 날이 없으셨다. 할머니의 기도는 이모들과 어머니의 기도로 이어졌다. 어머니들의 기도는 넓고 깊고 부드러우면서도 무엇보다 강하다.
아직 떼가 자리를 잡지 못한 마른 봉분 위에 잠시 손을 얹고 돌아왔다.
이소선, 박용길,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어머니들 앞에 나는 감히 존경한다는 말조차 부끄럽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있어서 바라볼 큰 나무가 되어 주시니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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