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사랑방

칼레의 시민

샘연구소 2012. 3. 12. 17:58

지난 1월 덴마크 여행 중 코펜하겐에 갔다가 칼스버그 맥주 창업자 가문에서 설립한 뉘칼스버그 미술관에 들렀다.

(http://www.glyptoteket.com/explore/history-glyptotek)

 

나는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입장료를 아끼려고 무료입장이 되는 일요일에 방문했다. 거대한 규모, 예술적인 시설, 알찬 전시 등은 방문객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었다. 친구, 연인, 가족, 노인들을 비롯해서 초등학교 저학년 쯤인 아이 손을 잡고 온 엄마, 열심히 댓 살 되어보이는 아이에게 설명해주는 아빠, 유모차를 밀고 온 이, 어린이들 열 명 쯤을 인솔하고 온 이 등 다양했다. 

이 미술관에는 덴마크를 비롯해 유럽의 미술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집트의 고미술 발굴도 지원하고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많은 조각품들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오귀스트 로뎅과 에드가 드가의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로뎅의 작품이라면 '생각하는 사람'과 '칼레의 시민'을 누구나 알고 있다.

 

나 역시 한국으로 나들이 온 로뎅의 작품들을 전시회에 가서 보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난히 칼레의 시민이 내 가슴을 때렸다.

그들의 저 초참한 모습은 무슨 이유일까? 왜 목에 밧줄을 매고 맨발로 있을까? 부랑자들 같지는 않아보이는데, 죄인들인가? 그러기엔 모습에 위엄과 교양이 있어보인다. 반역자들인가? 그런데 왜 '시민'이었을까? 시민...

나는 조각을 몇 바퀴 돌며 자세히 뜯어보고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칼레의 시민에 대해 조사해보았다.  

 

박물관에서 찍은 <칼레의 시민>

실제 사람 키보다도 크고 근육과 표정 등의 묘사가 실감난다.

6명이 각자 다른 포즈로 서있는 이 조각은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보는 이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347년, 벽년전쟁 초기의 일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이다.

 

잉글랜드 도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프랑스의 해안도시 칼레는 다른 해안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상의 이점 덕분에 영국군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이들은 기근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1년이 넘도록 영국군에게 대항하다 결국 항복한다.

 

처음에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1년 동안 자신들을 껄끄럽게 한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몰살시키려 했다. 이 때 칼레시의 시장이었던 비엔은 시민의 피해를 최소로 줄이되 존엄을 지키고자 적장인 영국인들과 담판을 벌였다.

 

“우리는 프랑스 국왕의 명령에 따라 이곳을 명예롭게 지켰소. 온 힘을 다했으나 먹을 것조차 떨어졌소. 당신들 국왕이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우리는 굶어 죽습니다. 도시 전체를 바치니 우리 모두 무사히 떠나도록 해주시오.”

 

이러한 시장의 설득에 감동받은 영국의 장군들이 왕에게 그의 말을 호의적으로 전했다. 마침내 왕인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시민 전체를 몰살시키는 대신 가혹한 다른 조건을 내걸었다.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허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그의 명령에 따라 칼레의 시민 중 6명은 삭발을 하고 목에 밧줄을 묶은 채 거리의 모든 열쇠를 갖고 맨발로 영국 왕 앞에 출두해야 했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론 기뻤으나 다른 한편으론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딱히 뽑기 힘드니 제비뽑기를 하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 부유한 상류층의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자 그를 이어 고위관료, 상류층 인물들이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 왕 앞으로 출두할 때 모든 시민이 울며 뒤따랐다고 한다.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그들이 출두할 때 영국군 장교들과 왕, 왕비까지 도열해서 이 장면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국왕이 처형명령을 내렸다. 영국군 장교들이 이들에 대한 처형은 국왕의 명성에 누가 될 것이라고 구원을 간청했으나 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왕비였던 에노의 필리파(Philippa of Hainault)가 나섰다.

 

“왕이시여,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부탁을 드린 적이 없습니다. 겸허히 청하오니, 성모 마리아와 당신이 제게 잉태시킨 사람의 이름으로 저 여섯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잠시 침묵을 지키던 왕이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는 왕비에게 “그대의 뜻대로 하라.”고 말했다. 이리해서 칼레의 시민들은 죽음을 피하고 모두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은 이후 상류층으로서 누리던 기득권에 대한 도덕성의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이행한 주요한 예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의 싸움에 패배했을 때 이러한 행진이 의식이었을 뿐 처형이 의례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는 14세기의 연대기 작가인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가 일부 부정확한 근거자료들을 가지고 사례를 미화하고 확대해서 애국심과 민족 정서에 호소하기 위해 윤택한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많다.

 

어쨌거나 한 도시의 위기에 소위 ‘지도층’ 또는 ‘상류층’이라는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도시를 지키고자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시민'의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내로라는 정계, 재계, 학계의 지도층을 보면 탈세, 법 위반과 재판명령 불이행, 위장전입, 병역 회피, 외국국적 취득 등을 많이 할수록 더 강력한 힘을 과시하는 것 같다. 자기들은 평범한 '시민'이 안 되려고 애쓰고, 아니라고 우겨대는 것 같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들의 위법은 쉽게 눈감고 이해해주고 잊어주는 것만 같아 속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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