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무지개청소년센터는 가양7종합사회복지관, 공릉종합사회복지관, 시립중랑청소년수련관, 한빛종합사회복지관 등과 함께 탈북청소년을 지원하는 멘토링 사업을 실시한다.
무지개청소년센터 홈페이지 www.rainbowyouth.or.kr/
특히 <무지개도서관>에는 다문화관련 자료들이 풍부하다.
오늘 멘토대상 사전교육에 한 시간 강의를 하고 왔다. 일정이 빡빡하다보니 내 시간이 자꾸 밀려서 안 그래도 짧은 시간이 더 짧아졌다. 덕분에 '요점만 간단히' 해서 오히려 알짜배기만 전달한 셈이 되었으니 그리 나쁠 것도 없겠다.
요즘 힘없고 가난한 부모를 둔 아동청소년들이 바쁘다. 이런 저런 복지사업들 덕이다. 좋기도 하지만 중학생 쯤 되면 아이들이 "좀 나좀 그만 내버려둬요!"하기도 하고 "으... 사회복지사 샘 봐서 이번만 참여해줄게요."하는 아이가 나타나기도 한다. 아뭏튼 어른들이 이런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르치고', '지원'하려는 각종 프로그램과 서비스들이 혹시나 아이들과 가족의 자율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해치는 면은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그 많은 프로그램과 서비스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멘토링이다. 그래서 가난한 아이들은 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여러번의 멘토를 만나게 된다. 과연 멘토링은 왜 하나? 어떻게 해야 될까?
정답은 없다.
멘토링의 목적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결국 참여하는
1) 멘티인 청소년들이 무얼 내놓고(시간, 자기 신상정보, 성실한 참여 등), 무얼 얻어가고 싶어하는지(학습지도, 문화체험, 악기연주, 한국사회나 교육에 대한 정보와 경험담 등) 그리고
2) 멘토들은 무얼 내놓고(시간, 대개는 교육으로 배운 지식과 기술, 부과된 프로그램 수행, 성실한 참여 등) 무얼 가져갈 것인지(경험, 학점, 봉사점수, 약간의 수당...)를 조합한 뒤
3) 기관의 미션과 지원할 수 있는 체계, 인력, 정보, 재정 등은 무엇이며
4) 나아가 가족과 학교, 지역사회, 전체 국가 등에 미칠 영향등을 생각해서 기술하면
그것이 바로 목적이고 내용이 될 것이다.
대개는 일반적인 청소년의 발달과업을 참작하여 정서적 지지와 학습지도, 학교생활 및 진로결정과 관련된 정보제공과 조언 등을 통해 취약한 지지망을 가진 아이들이 '위기'인 청소년기를 잘 지내서 내면의 힘과 외적인 사회적 자본을 획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된다.
하지만 아이들의 일상생활을 두고 볼 때 월1회에서 4회 정도의 빈도로 약 2시간 정도 만나는 멘토링으로 아이들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아니, 꼭 아이들에게 확인할 수 있는 어떤 영향을 남겨야만 할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건 가난하든, 외국인 부모들 두엇든, 북에서 내려왔든 간에 아이들은 보기보다 참으로 강하고 유연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외자'이기 이전에 어찌 보면, 이미 '생존자 suvivor'이고 '승리자 success'이다. 그래서 지나친 염려나 동정심, 거창한 목적과 셩과에 대한 의미부여보다도 내버려두되 손을 내뻗었을 때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 그런 존재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자체 정도만으로도 넉넉하다는 생각이다. 나이도 다르고 삶의 배경도 다르지만 6개월~1년 정도 함께 서로를 관찰하면서 서로 배우고 서로 발걸음을 맞춰보고 그렇게 사는 '과정'과 '모습'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해체되는 공동체와 삭막한 사회를 다시 살맛나고 사람느낌 나는 사회로 만들어가는 작은 발걸음이 될 것 같다.
멘토링은 연애랑 비슷하다. 짝사랑을 하는 멘토들도 생길 것이다. 진짜로 연애를 하면 우선순위가 바뀐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멘티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멘티와 한 약속은 가정 중요하게 챙기게 되기 때문이다. 뉴스나 기사도 탈북자 이야기가 나오면 귀가 솔깃해지고, 청소년에게 좋은 읽을 거리나,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물건을 보면 내 멘티가 생각난다. 그런데 정작 설레고 기대하며 만난 나에게 아이들은 냉담하기도 한다. 그래서 상처받는다. 하하... 어쩌랴... 그래서 연애엔 인내가 필수다.
바쁜 시간을 내어 선한 일에 참여하는 대학생, 청년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오늘 강의에서도 말했듯이 1년 후 멘티인 아이들만큼이나, 아니, 그들보다 더 성장하고 성숙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단, 헌신한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