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복지사업을 관여하다보면 "혜택을 받는 아이들이 받을 줄만 알고 고마운 줄을 모른다." "자꾸 공짜로 받으려고만 하는 노예근성이 생기는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은 그러니 아이들에게 봉사활동을 시키고, 감사의 소감문을 쓰게 해야한다고들 한다.
나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분노가 치솟는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1. 교육복지사업이 근본적으로 가난을 해결하지 못하니 욕구는 계속 있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욕구가 있다는 건 생명의 증거가 이닐까.
집에서 해줄 수 있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누가 일부러 '가난한 아이'라는 낙인감을 받아가면서 더 서비스를 받으려고 할까. 만약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서비스라면 그건 정말 잘 하는 일이니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하지 않을까.
2. 아이니까 받는 것이다. 내가 준 것도 아닌데, 왜 내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꼭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먹고사는 것도 다 나 혼자 잘나서가 아니고 아이가 못 사는 것도 제 탓이 아닌데 무얼 고마워하고 무얼 부끄러워해야할까.
우리는 자식에게 캠프를 보내고, 뮤지컬을 보여준 뒤 "엄마에게 감사하지? 그러니 봉사활동해라."고 하지 않는다. "재미있었니? 담에 또 데려갈게."라고 하지 않나. 난 십여년 교사생활하면서 아이들과 밥 먹고 놀러다니면서 "선생님에게 감사하지? 소감문 써라."고 한 적이 없다. 그래도 자식들, 제자들은 고마워한다. 당장 안 해도 10년 후, 20년 후 수줍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 때의 그 고마움으로 사회에 무언가 기여하려 한다. 그런 사회적 기여, 나눔을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니 믿고 기다려야 한다. 조급함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3. 봉사활동, 감사의 소감문은 가난한 부모가 못 해주는 것을 나라덕, 남덕에 공짜로 혜택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그 일이 좋은 일이라서 하는 것이다. 혜택을 받은 것과 별도로 누구든지, 모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덕목이다.
교육복지사업의 지원대상만이 아니라 부잣집 아이들도 봉사활동을 하고 부모, 교사, 이웃, 심지어 가난한 이웃에게조차 왜 감사한지 생각해보고 감사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엔 오히려 가난한 아이들이 더 마음이 순수하고 고마움을 잘 표현한다. 오히려 부잣집 아이들이 자신들의 누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에 고마운 줄 모르고 어려운 사람 이해하고 배려할 줄도 모르는 것 같다.
4. 만약 아이들이 정말로 고마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주는 이, 즉, 프로그램에 참여해라고 권한 이가 제대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켰거나, 아직 원하는지 자기 속의 진정한 욕구를 깨닫지 못했는데 시켰거나, 거만하게 또는 귀찮은 듯 시켰거나, 감동과 감사를 강요했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때일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노예근성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어른들의 불성실과 무관심, 정성 부족 탓이다.
5. 어느 학교의 교육복지사업 예산을 계산해보았다. 연간 7천만원. 전교생 약 1천명. 집중지원대상학생 200명. 이걸 12달로 나누면 집중지원대상학생 1인당 한 달에 약 2만원꼴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이다. 이게 소위 '노예근성'이라고 아까워하는 돈의 실체다.
웬만큼 사는 집에서는 아이들 사교육비로만도 30만원 이상을 쓴다. 교사들은 더 많이 투자하는 것 같다. 100만원쯤은 보통인 듯 하다.
그런데 자기 자식은 수십만원, 수백만원을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아이들에게 2만원 정도 투자하는 걸 갖고 감사의 소감문을 써라, 봉사활동으로 되갚아라, 노예근성, 거지근성을 길러주면 안 된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할 판이 아닌가.
하긴 아이들 중에는 간혹 정말 거칠고 마음이 안 통하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단돈 월 2만원이라도 지원해주기가 싫은.
그러나 그런 아이가 100명 중 몇 명일까. 더구나 내 자식이 자꾸 더 달라고 조르고, 참을 줄도 고마워할 줄도 모를 때 우리는 '버릇없다'거나 '내가 잘 못 키웠구나..' 하지 내 아이에게 '거지근성'이나 '노예근성'이 있어서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함부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
혹시 일을 하다가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참지 말고, 차근차근 조곤조곤 따지며 수정해드려야 한다.
오늘도 어려운 아이들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나 아빠,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믿고 사랑한 사람을 잃는 어린 아이. 세상이 나를 배반하는 기분이 아닐까.
우리는 작은 연애에도 가슴이 설레고 실연을 당하면 몇 달, 몇 년씩 절망을 한다. 영영 가슴을 닫아버리는 이도 있고 세상을 뜨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의 외로움은 몰라주는 걸까.
하나를 해결한 것 같아도 또 다시 큰 파도처럼 압도하는 과업과 유혹들. 그래도 아이들은 잘 웃는다. 아직 웃을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리게 해주어야 한다. 아낌없이. 그 아이의 미래는 아마도 훨씬 더 외롭고 힘들 것이기에...
꽃이 핀 것은 눈을 감아도 향기로 먼저 안다.
향기는 창문을 닫아도 스며든다.
밤나무꽃이 한창이다.
심한 가뭄이라는데 올가을엔 밤이라도 풍년이 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