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 관상, 이름 등이 우리 운명을 말해준다고들 한다.
이름은 개념을 정의하고 관계를 규정한다.
그래서 꽃이 의미가 되고 나에게 '무엇'이 된다.
요새는 '문제아'라고 하기보다 '문제행동'을 하는 아이 또는 '부적응행동'을 하는 아이라고 한다.
아이가 문제가 아니라 행동이 문제이고, 문제가 아니라 단지 그 상황,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위 '튀는' 아이란 뜻이다.
'결손가정'이라 하지 않고 '한부모가정', '조손가정'이라고 한다. 무엇이 없어서 결핍되고 손상된 것이 아니라 그냥 그자체로 싱글맘이나 싱글대디와 아이가 사는 가정,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아이가 함께 사는 가정으로 보자는 것이다.
'(복지)수혜자'나 '(지원)대상자'라 하기보다 '당사자', '수급권자'라고 한다. 삶의 주인으로서, 권리로서 복지권을 누리는 민주사회의 일원임을 되새기자는 뜻이다.
미성년자, 피보호자, 피교육자로서의 '학생'이었던 아이들이 '청소년'으로 불리우면 무언가 스스로 하고 꿈을 키우며 권리와 책임을 행사하는 주체로 여겨진다.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지원사업이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이 되었다.
교육복지에 대해서 저마다의 해석이 다르다.
비정규직 민간실무자인 교육청의 '프로젝트 조정자', 학교의 '지역사회교육전문가'가
몇몇 시도를 빼곤 거의 전국에서 '교육복지사'로 바뀌었다.
교육복지사.
외국에서는 이런 역할을 하는 이를
거의 school social worker(학교사회사업가 또는 학교사회복지사), 또는 social worker in schools 이라고 부르며, 북유럽에서는 sozialpedagogik(사회적교육자? - 학생의 사회적인 측면을 지원하는 교육계 실무자) 이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지금 교육복지사업에서 실무자들에게 요구하는 시각과 개입 전문성 역시 이들과 같은 바로 사회(복지)적인 것이다.
2003년 처음 교육복지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나라 교육계의 추진자들은 유난히 '복지사'라는 명칭에 거의 알레르기적인 거부감을 보였다.
복지사들에게만 교육부 쪽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 같은 인상을 피하려고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미 '학교사회복지사'란 이름으로 시범/연구학교에서 활약하고 있던 가슴 뜨겁고 열정적인 사회복지사들이 거북했던 모양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프로젝트조정자' 대신 줄여서 부르는 '피씨'와 '지역사회교육전문가'란 긴 명칭을 줄여 부르는 '지전가'가 이해할 수 없어서 쉽게 '교육복지사'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우선 '교육복지사'라고 하니 쉽다.
부르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단점도 있는 것 같다.
전에의 긴 이름일 때에는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만을 책임지는 실무자로 여겼는데
이제는 교육(지원)청이든 학교든 교육복지와 관계될 것 같으면 다 비정규직인 교육복지사들에게 넘기는 분위기라고 한다.
무상급식 학생 명단 관리, 지자체나 민간기관에서 오는 공짜 표 배급 등등... 윗분 생각에 이게 '교육복지'와 관련된다 싶으면 다 내려보내는 것이다. 현장에는 교육복지사를 마치 '교육복지 관련 행정실무사(보조)'처럼 이해하는 교사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교육복지사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안 그래도 내가 행정실 직원으로서 예산관리만 잘 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교무실 소속으로 아이들을 파악하고 일일이 서비스와 프로그램이 효과적, 효율적이 되도록 공부하고 기획하고 자원개발하고 모니터링하고 연계조정하고 평가하고 기록하는 전문직인지 양다리 걸치기하느라고 힘든데
이제는 마치 행정보조 같은 취급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있단다.
빨리 교육복지 전달체계가 정리되고
교육복지사들이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전문성과 열정을 헌신할 수 있게
명쾌한 법안이 적어도 대통령령 수준에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이름에 걸맞는 자질과 역량을 요구할 수 있게 선발제도도 다듬고, 자격연수도 내실화하고, 책임과 의무(해임요건)도 명문화하고,
근속수당이나 가족수당도 체계화해야 한다.
안개 속의 석양, 통영 앞바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