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위건부두로 가는 길

샘연구소 2011. 3. 10. 00:18

The Road to Wigan Pier

 

 

 

저자: 조지 오웰 George orwell

역자: 이한중

한겨레출판 2010년

 

 

조지오웰은 1903년 6월 25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태어났다. 자신이 책에서 말했듯 '하급 상류 중산층'이었던 그는 영국 사립 최고 명문인 이튼스쿨을 마치고 버마로 가서 인도제국 경차로 일한다.   식민지 경찰활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으로 영국에 돌아와 런던과 파리를 떠돌며 스스로 부랑자 생활을 하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1933)이란 책을 써내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나섰다. 원래 Eric Arthur Bair라는 이름을 버리고 '조지 오웰'이란 필명을 쓰게 된다.  

 

이 책은 1936년 1월 한 진보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실상을 취재한 글을 부탁받고 두 달 동안 위건, 리버풀, 셰필드 반즐리 등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 일대의 탄광지대에서 광부의 집이나 노동자들의

싸구려 하숙집에 살면서 조사한 결과물이 이 책으로 1937년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자마자 때마침 발생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기 위해 떠났고 이후 전쟁체험을 <카탈로니아 찬가>(1938)이란 책으로 펴냈다.   이러한 삶의 체험들은 조지 오웰의 지향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고 이후 <동물농장>(1945), <1984>(1949)를 구상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1950년 폐결핵으로 45세에 사망했다.

   

박노자는 추천사에서 "사회주의란 결국 노동하는 인간을 '윗사람' 앞에서 굽실거리는 '개미'로 만드는 자본 독재에 대한 모든 상식적, 양심적인 사람들의 반란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계급적 성향에 대해 매섭게 비판하며 노동자들이 인간적 삶을 살 수 있는 희망을 사회주의로 설정하여 연대를 주장한 그는 정말로 '양심적'이고 '상식적'이다.  

 

최근 학교사회복지사업 자문위원으로 과거의 탄광지역을 카지노로 재개발한 강원도 고한에 자주 다니고 있기에 탄광사람들의 삶이 더더욱 깊이 와닿는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의 부모 또는 조부모들의 삶이었고 그들의 삶을 제한하는 이 계급구조와 자본주의에서 학교사회사업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 아이들의 삶에 얼마나,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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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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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출신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합당한 한계 내에서는 얻을 수 있다는 일정한 예상을 하고서 살아갈 수 있다. (67)"

그런 예상이 불가능한 사람이 바로 프롤레타리아란 뜻이다. 오늘날의 실업자, 소규모자영업자, 비정규직노동자, 사회적일자리 취업자...들이 그렇다.

어떤 어른이 말했다. "열심히 노력해. 그래야 잘 살지."

그러자 친구가 대꾸했다. "노력한 만큼 댓가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르조아(자본가, 재산가)이다.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댓가를 얻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라고.

아니, 없는 자들은 '노력'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실제로 가난과 실업은 사람을 무력화한다. "실업이 남자든 여자든 모두를, 특히 여자보다는 남자를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무기력감은 아무리 지성이 뛰어나다 해도 떨쳐버리기 어렵다. ...(중략) ... 실업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는, 무엇엔가 전념한다는 것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대감'을 발휘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111)

 

그래서 그는 농촌생활을 제안한다. 

"원하는 모든 실업자에게 약간의 땅과 연장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중략) 시골에 가면 누가 실직했다는 얘기를 거의 들어볼 수 없고 도시처럼 한 블록 전체가 실업수당으로 살아가는 광경을 아예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14)". 실업수당의 폐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실업자들이 구조보다 옆집의 다른 실업자를 더 경계하며 도박으로 패가망신한 사람만큼 수치스러워하고, 무력감과 절망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값싼 의류와 영화, 차 한잔의 여유와 도박산업, 전기의 혜택 따위가 이들을 값싸게 보상해주고 있다고 비판한다.

 

또 그는 "한데 노동계급과 정말 가까워진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154)"라면서 가족에 대한 태도, 말투, 무엇보다도 그들의 특이한 냄새가 어려서부터 혐오스러운 것으로 교육되는데 바로 이 후각에 대한 기억과 판단이 자신을 노동계급과 가까워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차단한다며 스스로 괴로워한다.  그 자신이 상류층에서 맨 밑바닥에 속하는 중산층으로서 경제적으로는 중상층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류층과 동일시하는 그 '충격완화계층'으로서 얼마나 스스로 우습게 자라왔고 생활해왔는지를 고백적으로 자아 비판한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과연 얼마나 될까? (182)",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중략)..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어느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를 봐도 그렇다. ........(중략)...... 그는 이론상으로는 바리케이드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만, 아직도 양복 조끼 맨 아래 단추는 채우지 않는다. (183) "

 

이쯤에서는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솔직이 나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바로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듯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212)"  그러면서 '민감하고 눈물많은 전쟁 전 인도주의자의 풀륭한 표본'인 존 골즈워디의 글들을 인용하고 비판한다.

 

"민감하고 눈물많은 감상적 인도주의자".

마치 나의 모습을 들킨 것 같아서 숨고만 싶어진다.

자기의 부분을 포기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실천이 없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예수가 말한 '회심'이다. 나는 아직도 멀었다.

 

그는 영국의 영화와 번영이 인도, 아프리카 등에 대한 식민지배에 근거하고 있음을 간파하면서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을 직시하라고 한다. 

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몸과 마음, 취향, 습관, 행동, 태도, 삶의 속속들이 중산층임을 고백하며 정말로 프롤레타리아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엔 같은 사람인 줄 모를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 계급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도, 더 어리석은 형태의 속물근성을 억제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마도 그러기 위해 나에게 요구되는 것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217-218)"라고 말한다.

 

 

결론으로 짚을만한 구절을 꼽으라면 아랫 글이다.

사회주의를 경제적 정의로만 축소할 수는 없으며,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문명과 우리 자신의 생활양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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