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과 이슈

지금, 이곳에서 출발하기

샘연구소 2011. 7. 26. 20:59

사회사업을 배울 때 지금은 은퇴하신 조휘일 교수님으로부터 실천에 대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았다.

그 중에 하나는 클라이언트가 있는 지금, 여기서 출발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일하면서 이를 실천하기는 힘들었다. 클라이언트를 대하면 이미 규격화된 양식에 써넣을 조항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클라이언트인 학생을 짧은 시간 안에 이미지로 저장하고 그와의 짧은 대화, 간단한 그 양식에 쓰인 내용으로 시간, 공간으로 잘게 쪼개어 진단하고 평가한 최종 결과를 기억하게 되었다. 물론 학생과 교사가 호소하는 문제를 주 개입의 출발점으로 삼기는 하지만 대개는 교사와 학교사회복지사인 내가 종합병원식으로 '다면적 평가'에 의해 결정한 것을 학생을 순순히 받기만 하면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것이 학생 자신이 빠진 '지금, 이곳'에서의 출발히었다.

 

학생 자신이 주체가 되어 "지금 처한 곳"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과연 전문적이고, 성과가 있을 것인가? 나의 한 경험이 그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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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이 있었다. 김광수라고 하자.

중1 남학생이다.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담임교사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지각결석이 잦고 준비물도 잘 안 챙겨오는데 교사에게 저항하여 대답도 잘 안 하는 골치아픈 학생이라고 했다.

학생을 불러들였다. 사회사업실에 마주 앉았다.

 

나: 네 선생님에게 만나보라는 말씀을 듣고 불렀어. 선생님이 너를 소개한 걸 보면 네가 학교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너 왜 그렇게 자주 지각, 결석을 하니? 문제가 뭐지?"라고 캐묻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 ...

나: 학교 다니기 힘들지? 

학생: 아니요.

나: 잘 생각해봐. 뭐가 힘든지... 공부하는 거? 학교 나오는 거? 친구관계?

학생: 없는데요.

나: 그래? 그래도 더 생각해봐.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뭔지...(좌절금지! 그리고 인내가 필요했다.)

학생: 음.... 체육시간에 준비운동으로 운동장 세 바퀴 뛰는 게 힘들어요.

나: 그렇구나. 왜 그렇지?

학생: 뚱뚱해서요.

나: 정말 그런가? 그럼 우리 보건실에 가서 보건선생님과 상의해볼까?

보건실에 가서 체중을 쟀고, 70킬로가 넘는 체중이 나왔다. 비만이라고 했다. 사실 덩치가 크고 누가보아도 비만이었다.

나: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학생: 살을 빼야지요.

나: 그래. 살을 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니?

학생: 운동하고..

나: 그래. 운동. 그리고 또?

학생: 먹는 것 조절하고...

나: 그래. 좋아. 그럼, 운동과 먹는 것 중심으로 같이 조사해보자.

 

이렇게 해서 공동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 운동

다행히 아이는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피하지도 않으면서 하겠다고 해서 아침 수업 시작 전 30분 일찍 나와서 운동장을 달리기로 했다. 나도 운동삼아 함께 달렸다. 나중엔 남자 선생님이 대신 달려주셨고 나는 간단히 빵과 우유를 준비해서 아침 간식으로 주었다. 아이는 지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이를 본 아이들이 자기도 살 뺀다고 같이 뛰겠다고 해서 몇몇이 같이 뛴 날도 있었다. 아이는 선생님, 친구들과 같이 뛰면서 자랑스러워했다. 한 두어달 뛴 것 같다.

2. 먹는 것

우선 아이가 먹는 것을 조사하여 보기로 했다. 최근 1주일간 먹은 것을 적으라고 했다. 빵, 라면, 우동이 다였다. 음? 밥은 없네? 궁금했다. 아이는 그런 인스턴트식품을 많이 먹어서 살이 찌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밥을 어떻게 먹나에서 막혔다. 가정방문을 해보았다. 엄마랑 둘이 살다가 최근 엄마가 새아빠가 생겨서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집은 살림이 돌보아지지 않고 있었다.

엄마를 만나러 갔다. 엄마는 살림을 할 능력이 떨어지고 자기자신을 돌보기도 힘든 지적지체수준이셨다. 그리고 새아빠가 자기를 놔주지 않는데 아주 무섭고 난폭한 남자라고 했다. 조금 두고 보기로 했다.

일단 아이와 함께 계획을 세웠다. 근처 복지관에 의뢰해서 석식도시락 배달서비스 신청하기. 아이는 먹어보고 만족한다고 계속 먹겠다고 했다. 일요일이 문제였다. 마침 아이와 학교 옆 식당에서 밥을 사먹었는데 주인이 얼마전 내가 장학금을 끌어오려고 실랑이를 벌이느라 친해진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상의 끝에 주인 아주머니가 일요일에 교회에 나오면 점심을 주고 반찬을 싸주겠다고 했다. 아이에게 교회에 나가는 것 어떤지 물으니 좋다고 했다.

3. 기타

아이가 생활하는 곳: 교실과 집 -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교실로 찾아가서 아이의 일상생활을 관찰했다. 쉬는 시간에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점심시간에도 혼자 벽을 보고 앉아서 식판의 밥을 먹고 있었다. 나는 가끔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김광수란 존재를 들먹였다. 관심을 끌어보려는 의도였다. "얘들아, 광수 요즘에도 지각 자주하니?"라거나, "광수랑 밥 같이 먹어본 사람 있니?" 아이들은 조금씩 광수의 존재에 흥미를 보여갔다. 집에 가서 대청소를 하고 학교 창고에서 정리함을 가져다가 널려진 옷, 책 등을 치웠다. 반지하이지만 방이 환하고 깨끗해졌다.

아이에게 중요한 어른 : 교사 - 담임교사에게 아이를 만난 경과를 말씀드리고 가정방문한 것, 등등 진행계획을 알려드렸다. 그리고 아이가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말이 어눌하니 "왜 오늘도 지각했어?"와 같이 윽박지르는 것 같은 말, 답을 재촉하는 질문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렸다.

아이에게 중요한 또래 : 친구 - 이런저런 이유와 모습으로 학교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모아서 여름방학하는 날 숲속캠프를 함께 데리고 갔다. 자연 속에서 개구리 알을 주워오고, 가장행렬 때 여자분장을 하고 기꺼이 웃음을 선사하면서 아이는 자신감을 회복해갔다. 돌아온 뒤 캠프 사진을 사회사업실 벽에 붙여두니 와서 보고는 학급 친구들 데려와서 자기 사진이라고 보여주고 자랑했다.

 

아이는 차츰 달라졌다. 공부하고 싶으니 참고서를 구해달라고 했다. 방과후에 사회사업실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갈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했다. 발표할 때 자신이 없다고 해서 사회사업실 옆 빈 공간에서 책을 주고 내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읽게 하면서 발표력 훈련을 시켰다. 소풍가는 것을 잘못 알고 학교로 오기도 했고 야외행사 점심을 못 싸가는 일도 있었다. 준비물을 못 챙겨오면 나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아이는 점점 달라졌다. 지각, 결석도 없어졌고 담임과의 갈등도 해결되었다. 사회사업실에 오는 날이 뜸해져갔다. 복도에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장난치는 모습을 자주 봤다. 웃으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학년이 바뀌었다. 아이는 외할머니가 돌보기로 했다. 겨울방학이 지나고 보니 아이는 몰라보게 성숙해졌다. 복도에서 만나도 쑥스러운 듯 씽긋 웃고 지나치면 그게 다였다. 큰 체구에 어울리게 당당하면서도 수줍은 모습이었고 성적도 올랐다. 사회사업실에 오지 않았다. 교실에서 행복한 모습이었다.

 

점점 나를 찾지도 않고 복도에서 만나도 그리 아는 체도 안 하는 아이를 보면서 사실 난 좀 쓸쓸했다. 그리고 결국 졸업식 날에도 나에게 인사하러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그 아이는 '스스로 선' 것이다. 내가 잠시 곁에 있었고 의논상대가 되어 주었던 것뿐이다. 그가 이미 다 가지고 있던 대안을 추진하도록 격려했고, 요구하는 것에 대해 아는 정보와 서비스, 도와줄 사람을 알려주었고 모든 것은 결국 아이가 스스로 선택해서 스스로 행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금, 여기서' 출발한답시고 "학교생활 하면서 또는 살아가는데 힘든 게 뭐니?"라고 던진 질문이 참 황당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불편하고 아파도 그런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에게 내가 너무 난감한 질문을 했던 것같다. 그렇다고 해결중심식으로 "뭐가 조금 더 달라지면 제 삶이 지금보다 좀더 행복해질까?"라는 질문도 참으로 '손발 오그라든다'.

 

대상 학생의 나이, 성별, 관심사, 이해정도 등에 맞게 욕구를 표현할 수 있도록 적절한 질문을 개발하는 것이 바로 전문성이다.

특히 아이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서부터 출발하도록 하는 질문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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