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과 이슈

아빠와 사는 아이들

샘연구소 2011. 7. 27. 18:58

학교사회복지사로서 만나는 아이들 중에 아빠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집이 점점 늘어난다. ‘조강지처’나 ‘처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아빠들보다도 하루아침에 집을 나가버리는 엄마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걸 빈곤지역에서는 한 해가 다르게 실감한다.

 

왜 그럴까?

 

체감하기에 기본적으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고용없는 성장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일하던 것마저 비정규 고용형태로 바뀌고 있다. 그나마 하던 일도 1년 만에 해고되고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과거 ‘막노동’으로 살던 남자들의 일자리가 특히 크게 줄었다. 기계가 대신하고 그 기계를 여성들이 많이 움직인다. 실업자가 되어 돈을 못 벌어오는 무능한 남편, ‘집을 지키는’ 아빠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 아빠들 중 많은 수는 알콜에 의존하거나 도박에 빠지기도 하고 술기운에 힘입어 애꿎은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한다.

 

한편 엄마들은 상대적으로 요즘에 남편들보다 일자리 찾기가 쉬운 모양이다. 최근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 ‘노동유연화’ 정책이라고 해서 시장여건과 회사 수입구조를 보아 인력을 어느 때든 해고하고 채용할 수 있게 하는 ‘비정규직 고용’이 대세인데다가 사회 각층에서 복지제도가 확대되면서 저임금 비정규직의 감성노동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가난한 엄마들 입장에서 보면 사실 발등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 오늘 당장이라도 맘 잡고 나서면 식당이나 야간 술집의 홀 서빙, 주방, 빌딩 청소 등의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 외에도 비정규직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사회화된 가사노동 분야에 여성의 일자리는 남성보다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엄마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집을 떠난다.

 

징글징글한 남편 꼴 보지 않아도 되고, 나혼자 벌어서 살 수 있으니 떠나는 것이다.

떠나는 눈 앞에 어찌 자식이 밟히지 않았을까?

어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떠난 이후 자식 생각에 우울증과 자살충동에 시달려 몇 년째 약을 먹고 있다. 아빠는 대낮에든 자정이든 밥집에서 만나도 언제나 안주 없이 깡소주를 마시고 피오줌을 싼다. 나는 그 엄마와, 엄마가 두고 온 딸, 그리고 그 딸에 ‘얹혀 사는’ 아빠 모두를 상담한 적이 있다.

 

 

이놈의 가계도를 그릴 때마다 얼마나 울화가 치밀었는지... 왜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결손'이나 '부재'를 표시해야 하느냐 말이다. 가계도라는 공식 자체가 부, 모, 자, 녀 등을 규범으로 한 틀 아닌가 화가 났다. 하지만 그게 가정 속의 아이를 이해하는 틀이란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이들은 아빠도, 엄마도 필요하고 부재시 그로 인한 영향을 온 몸과 마음으로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빠의 실직, 알콜의존, 폭력, 부모의 불화, 엄마의 가출, 실질적 이혼, 그리고 그 이후 엄마의 부재, 가사 부담, 아빠의 지속적 폭력, 정서적 고립감과 배신감 등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학습에 의욕을 잃고 집중이 안 되고, 감정조절을 잘 못하고 일부러 비행써클에 어울려보기도 하는 등 소위 '문제행동'을 하면서 자기를 방어하고 위로한다.

 

이 과정에서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대처하는 방식이 다른 것 같다. 특히 사춘기 무렵의 여자 아이들은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가 크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훨씬 더 민감하다. 그래서 더 많이 힘들어한다. 그러나 힘든 시기를 지나면 스스로 감정을 정리하고 훌륭한 가사책임자, 주부로 거듭나는 모습을 본다.

 

미국의 연구결과들을 보면 이혼 후 약 3년 정도는 아이들이 큰 정서적 상처로 괴로워한다고 한다. 또, 홍순혜교수의 연구를 보면 이혼 자체보다는 '빈곤'이라는 매개 또는 전제조건에서 이혼가정 아이들이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우리는 가난하고, 한부모가정인, 특히 엄마가 떠나고 아빠와 사는 아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내가 만났던 많은 아이들은 물론 교사들을 골치 아프게 하고 걱정을 끼쳤지만 스스로  잘 헤쳐나갔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고 하지만 그런 위기를 흔들리지 않고 지나는 아이가 있다면 오히려 비정상일 것이다.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래서 흔들리게 하자는 것이다. 울게 하고 힘들어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다. 이야기해주고 들어준다. 믿어주고 기대해준다.

그럼 때가 되면 아이들은 마침내 딛고 선다.

아빠를 위해서 살림을 돌보고, 그런 아빠를 돌봐주고, 측은히 여긴다. "나마저 떠나면 아빠는 어떻게 하라고요?"라는 아이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하고, 동생을 돌본다. 

 

그래서 그 곁에 있을, 일관되게 기대를 포기하지 않는 지지적인  어른이 필요하다.

그는 교사일 수도 있고 학교사회복지사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외부의 멘토일 수도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어쩜 그 아이가 한 20년 쯤 더 지나서 엄마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나 엄마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오늘은 아빠와 사는 씩씩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지낸다.

외로워하고 힘들어하며 또 그래도 아빠탓을 할 줄도 모르고 그냥 사는 아이들을 생각하겠다.

그런 속에도 명랑하게 웃으며 씩씩하게 일어나 살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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