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과 이슈

청소년과 폭력

샘연구소 2012. 3. 25. 10:11

연초에 또래의 괴롭힘에 시달리던 중학생이 참다못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로 인해 큰 사회적 이슈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마치 그동안 살면서 억눌러온 억울함과 분노를 이 사건을 핑계삼아 분출하려는 듯 소위 폭력적인 학생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교과부를 비롯해서 교육계와 경찰계는 그런 사회적 분노와 복수심에 응답할만한 대책을 보고해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서둘러 청소년, 학부모들과 간담회를 하고, 대책회의를 하고, 지침을 내려보내고, 여론매체를 통해 대책을 발표했다. 그 사이에도 각계의 전문가들, 자신 스스로 불안한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자녀를 길렀거나 기르고 있으므로 나름 '나도 해봐서 아는데... '하는 시민들이 여기 저기에 의견을 발표했다.

 

교과부와 경찰의 발표는 내 마음을 찢어지게 한다.

발표된 대책들은 소위 폭력적인 청소년들에 대한 불신, 분노, 복수심, 무시, 훈계(조작)하려는 오만함이 가득하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겸손함과 존중하는 자세가 결여되어 보인다. 아이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학적 이론과 지식에 대한 고찰도 부족해보인다.

 

나는 청소년의 폭력을 인정하거나 남을 괴롭힌 아이들을 감싸고 돌려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대책들이 오히려 나에게 인간적 모멸감과 분노, 억압, 불안을 일으키는데 과연 이것이 옳은지 되묻고 싶다.

이건 아니다.

 

몇몇 눈에 띄는 현장의 목소리들이 있다.

 

하나는 교육개발원에서 내는 교육정책포럼에 실린 글들이다. 

거기서 교사, 학부모, 교과부 관리, 교육개발원 연구원, 상담학 교수 등이 나름대로 보는 관점과 분석, 대책들을 내놓았다.

나는 설선국이라는 중학교 선생님의 글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http://edpolicy.kedi.re.kr/EpnicForum/Epnic/EpnicForum01Viw.php?PageNum=1&S_Key=&S_Menu=&Ac_Code=D0010103&Ac_Num0=13981)

그의 말대로 학교현장은 일부 못된 아이들의 폭력적 행동과 폭력사건만 색출해서 분리하고 엄벌하면 되는 게 아니라 아이들 전체가 불안정하고 예의도 없고 폭력적이다. 중학교에 가서 몇일만 지내보라. 얼마나 아이들이 산만하고 예의 없고 거칠게 행동하는지.

그런데 교사들은 권위도 힘도 시간도 부족하고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도 부족하다.

이런 현장을 무시한 채 또 무슨 대안을 세워라, 시행해라, 보고해라.. 라고 하는 것은 안 그래도 교사가 아이들에게 집중할 수 없는데 더 바쁘게 하고 아이들로부터 떨어져서 컴퓨터 앞에 앉아있게 할 것이 뻔하다. 

그의 말대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미 가정에서부터 안정적인 돌봄과 신뢰, 가정교육을 받지 못해 정서가 불안정하고 남과 서로 평화적으로 의사소통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런데 학교는 이런 아이들을 바쁘게 하고 경쟁시키고 억압하고 무시하고 겁준다. 가정과 학교가 손잡고 불안과 폭력을 더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모든 시민이 내 아이, 이웃의 아이, 제자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함부로 조종한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와 교사들에게 부모노릇, 참 교사노릇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부모들이 일 때문에 아이들을 외면하거나 자기욕심과 불안으로 아이들을 함부로 조종하는 일을 그만두게 해야한다. 

그런 일을 조장하는 신문을 비롯해서 각종 매체들과 학원(심지어 학교도 이를 조장해왔다. 한심한 일이다.)들이 아이들보다 먼저 규제되어야 한다. 미성년자가 있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돌볼 수 있게 근로조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교사들에게 일을 더 하라기보다 어쩌면 일을 더 빼내야 한다고 본다.

몇몇 지나친 행동에 대한 집중적 지도와 처벌은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하다.

 

몇 일 전 신문에 '거리 청소년'을 극복하고 평화를 찾은 대학생의 이야기가 실렸다.

지난 3월 21일 학교폭력문제 해결을 위한 '2012 문화예술교육 포럼'이란 곳에서 발표한 자신의 경험 내용이다.

어려운 시절을 잘 마치고 대학생이 된 김효진이라는 여학생은 중고교시절부터 친구들을 괴롭히고 삥 뜯기 등 온갖 못된 짓을 일삼았다. 물론 예상할 수 있는대로 그녀의 뒤에는 어려운 세상을 사느라 사건도 많고 고통도 많았던 가정사가 배경으로 있다. 이혼, 재혼, 사별, 학대, 그리고 하나뿐이던 엄마의 죽음. 

아마 지금의 여론 분위기라면 그녀를 사회로부터, 내 아이들, 내 교실에서 분리해내고, 벌 주고, 별도의 치료와 교육을 해야하는 '병균'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가? 그녀는 우리가 증오하고 복수해야할 못된 청소년이기 이전에 그런 전쟁같은 삶 속에서 버티고 있는 '생존자'였다.

그녀는 학교에 머물 수 없었고 떠돌이가 되었다. 죽고싶은 순간에 한 목사님과의 대화가 그녀를 건졌다.

그리고 한 쉼터에서 새 삶을 찾았다. 쉼터에서는 그녀를 유별난 존재로 취급하지 않고 그냥 한 인간으로 함께 했다. 그녀는 그냥 보통 아이들이 하는 것 같은 음악밴드, 여행을 했다.

그리고 힘을 좀 얻자 자기같은 청소년들을 만나러 거리로 나갔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어른들은 청소년의 행동을 고치려고 하는데 그건 쉬워요. 그러나 그건 잠시 바뀌는 것뿐이에요.

중요한 건 아이들의 아픈 마음을 바꾸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부는 학교폭력을 줄이기 위해 ‘인성교육’을 강화하겠다지만, 하고 싶은 게 있고 목표가 있으면 폭력을 쓸 시간이 없어요.

인성교육에 앞서 아이들이 ‘국·영·수’ 말고 하고 싶은 걸 찾을 수 있는 교육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학교에서 지역사회교육전문가로, 인턴상담교사(전문상담사)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도 바빠졌다.

'고위험군' 아이들을 색출해서 미리 상담도 하고, 예방교육도 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보고해야 하고, 이런 저런 프로그램도 해서 폭력이 감소했다는 수치를 보고해야 할 것이다.

 

정말 우리가 해야할 것은 무엇일까?

부산에서 학교사회복지사로 뜨겁게 일하던 동지 고윤정의 글이 나의 대답을 대신해준다.(여성주의 저널 '일다'란 곳에 그녀의 글이 실렸다.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6004)

감시와 감찰이 일상적 폭력문화를 '더' 키운다. 그렇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타인을 괴롭히는 쾌감 대신, 함께하는 즐거움을 알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 맞다!

그리고 폭력은 오로지 평화로 풀어야 해결된다는 것이다.

역사는 폭력이 폭력을 재생산하고 심화하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나? 전쟁...

왜 교육이, 아이들이 전쟁의 '적'이 되어야 하는가?

평화를 느끼게 해주는 교육과 상담, 아니, '폭력'이니 '평화'니 하는 말조차 입에 올리지 않은 채 행동하는 평화, 비폭력.

그것이 해결의 실마리가 아닐까?

 

 

 

운전하다가 앞의 차 뒤에 붙은 '초보운전'  안내표지가 너무 귀여워서 찍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저도 제가 무서워요. 나 인생 초보..."

 

어떤 이는 청소년들을 '엄청 힘이 넘치는 엔진에 허접한 브레이크'를 단 자동차와 같다고 했다.

인생초보인 아이들.

힘 넘치는 엔진에 불안한 브레이크로 자기도 스스로 무섭다는 아이들.

감시와 처벌보다 사랑과 신뢰, 평화를 맛보게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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