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이스마엘 시리즈

샘연구소 2012. 4. 10. 11:29

몇 년 전 <고릴라 이스마엘>이란 책을 읽었다.

전 지구의 역사와 환경, 종교(특히 기독교)의 문제를 꿰뚫어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신선한 소설이었다.

친구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한 교회 목사님에게도 선물로 드렸다. 하지만 그들이 책을 읽었는지.. 별 반응이 없다.

 

 

주인공은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스마엘'이란 고릴라와 그를 찾아간 주변인스러운 한 평범한 사람이다.

고릴라의 이름인 이스마엘은 기독교의 성경 구약에서 '역사'의 초창기인 아주 옛날, 그러니까 예수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아브라함이란 선조가 아들이 없자 여자 노예에게서 얻은 아들이다. 하지만 늙은 부인에게서 적자가 태어나자 이 아들을 추방해버렸다. 기독교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적자인 이삭의 후예가 이스라엘이고, 추방된 서자 이스마엘은 팔레스타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삭이 농경의 상징인 카인과 목축의 상징인 아벨을 선조들로 가지고 있다면 이스마엘과 팔레스타인은 농경도 목축도 아닌 채집과 수렵의 생존양식을 가진 종족이다.

 

또 왜 하필 고릴라일까. 감히 고릴라가 인간을 가르치다니...

사실 고릴라는 영장류 중에서 가장 큰 몸집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 나온 이스마엘류의 고릴라는 채식을 하고 있고 평화롭고 지혜로운 종이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 개발과 관광 등으로 충분히 먹을 만한 숲이 사라지고 안전한 서식지를 잃으면서 멸종의 위기에 처하고 있다. 저 멀리 아프리카 숲 속 한 생물종의 멸종은 결국 전체 생태계의 먹이사슬에 영향을 주고 언젠가 인간에게도 새로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려는 것일 듯 하다. 

 

어쨌든, 이스마엘이란 고릴라를 통해 전해지는 작가의 생각에 독자는 때로 반대하고 거부하거나 찬성하고 동의하면서 이야기를 읽어나가기도 하고 중간에 덮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이스마엘은 단순히 강연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끈질기게 질문한다. 또는 침묵한다.

 

나에게 <고릴라 이스마엘>에서는 내가 호흡하고 발 딛고 먹고 싸면서 사는 지구라는 자연, 생태계에 대한 경이와 존중의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책이었다. 특히 이스마엘을 추방하고 세계의 주도권을 쥐게 된 '이삭'계 기독교 백인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비 기독교적인 행태를 자행하고 있는지, 그것이 창조를 얼마나 거스르고 위협하는 일인지를 깨닫게 했다. 진정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과 '창조', 섭리, 주권 등을 믿는다면 지금과 같이 행동할 수는 없을 것임을 지적한다. 나는 미래세대인 청소년들과 특히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최근에 그 속편인 <나의 이스마엘>이 나왔다.

이번엔 읽기가 지난 번보다 더 까끌까끌하고 지루한 면이 있다.

그래도 12살(우리식으로 하면 초등학교 6학년이거나 중학교 1학년일) 소녀와 문답식 대화법으로 생각하고 답을 찾아가게 하는 과정에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 자신도 깊이 생각하게 되고 깨닫기도 하게 되는 '이스마엘 시리즈'만의 독특한 개성을 한껏 즐겼다.

특히 <나의 이스마엘>은 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성찰하게 한다.

 

주인공 쥴리는 아빠가 없고 술에 중독된 엄마와 함께 산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다가 이스마엘을 찾아가게 된다.

이스마엘의 메시지는 좀 동의하기 어렵다. 마치 지금의 개발과 발전을 포기하고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가라는 것 같다. 채집, 수렵, 소규모의 원시 공동체, 대량생산과 축적, 사유재산제를 부정하고 대신 공동소유와 돌봄을 가치로 하는 그런 사회를 주장하는 것 같다. 그는 인류의 긴 역사를 볼 때 지금같이 가진 자들이 곳간 열쇠를 쥐고 전 인류를 억압하던 시절은 아주 짧다면서 인류는 그 게임의 방식에 포섭되어서 스스로 죽도록 일하면서도 불안과 굶주림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소위 자본가, 권력자라 할 수 있는 '테이커 taker'와 무산자인 '리버 leaver'의 대립관계이다. 이미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그런 문화의 세례 속에서 성장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런 양식의 삶 방식은 해결할 수 없이 증가하는 빈곤, 중독, 정신적 방황과 외로움, 범죄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새로운 축제, 유흥, 의식, 음식과 오락, 드라마, 게임, 사치, 스포츠, 전쟁, 사회운동, 탐험, 직위, 알코올, 약물, 노름, 매춘, 예술, 정치, 텔레비전, 주식시장, 포르노... 등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마치 그런 불행이 인간본성이어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양 세뇌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리버' 사회에는 그런 고민과 자살 따위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번 <나의 이스마엘>에서 저자는 특히 교육의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번역자가 현직 교사이던에 이 부분 때문에 번역하기로 결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교육에 관한 부분들을 번역하면서 무척 가슴이 두근거렸을 것 같다.

이스마엘에 의하면 긴 학교교육과 성인기를 무한정 유예시키고 있는 소위 '청소년기'란 것은 사춘기를 지나 이미 성인과 다름없는 아이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조절하는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교육이나 사회화는 결국 아이들을 '테이커' 사회에 포섭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스스로도 필요한 것을 찾아서 잘 배우는데 학교교육은 졸업과 함께 잊어버려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을 것들을 배우게 하느라 아이들을 억압하고 순응시키고 각종 기술로 평가하며 몰아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렇게 해서 졸업한 아이들은 고작해야 단순노동을 하거나 대다수가 사회의 루저가 되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이것은 유산자인 '테이커'들이 그들의 '식량창고에 자물쇠 채우기' 때문이다.

 

나 역시 대학입학 본고사를 치른 뒤 이과계의 교재와 참고서들을 다 팔아치웠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싸인과 코싸인, 물리학과 화학의 기호와 원주율인가 하는 것들, 조선왕조의 법과 정책의 연대 땨위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구조와 시험제도가 나도 모르게 나를 12년동안 결박했던 것이다. 그것이 없었다면 내 '지적능력'은 성장하지 못했을까?

 

이스마엘은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되며 자신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 하나 하나가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혁명은 일시에 들고 일어나는 쿠데타가 아니다. 그런 방식은 옳지도 않으며 성공할 수도 없다. 소위 혁명의 일곱가지 강령이라고 주장하는 내용들은 누구에 의해서도 주도되지 않고 계획이나 목표도 없으되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며 혁명의 결과인 보살핌이란 보상을 나눠 갖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소위 '새로운 부족혁명'이다.

 

그가 주장하는 부족혁명은 어떻게 가능할까?

"감옥의 문을 열어라. 그러면 사람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건설하라. 그러면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어머니 문화가 나쁘게 말하던 것이라고 해서 눈길을 돌리지 마라.

대신 어째서 어머니 문화가 그것들을 나쁘게 말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라."

 

이스마엘의 마지막 메시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싫다.

하지만 잠시 숨을 가다듬고 우리의 '생각의 좌표(홍세화)'를 살펴볼 일이다.

교육은 무엇이며 그 긴 교육노동과 생산적 노동에의 유예, 부모의 투자의 댓가로 청소년에게 주어지는 이후 80년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또 최근 선거를 앞두고 넘치는 공약과 정책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단지 '테이커'사회의 규칙을 좀더 복잡하고 세련되게 하려는 건 아닐지.

 

 

 

<고릴라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평사리, 절판되었음)

<나의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평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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