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말하는 건축가

샘연구소 2012. 4. 15. 18:07

나는 어릴 적 한 때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건축 잡지를 사모으고 여성지나 신문에 나온 설계도면을 오려서 스크랩해두기도 했다.

멋진 건물을 보면 구조가 어떨지, 창틀은 어떤지, 기둥과 마감재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햇볕은 어디로 들며 바람은 어디로 나는지, 주변 자연이나 동네와의 조화는 어떤지 .. 궁금증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자꾸 더 보게 된다.

 

재작년인가, 무주에 공공시설들을 설계한 정기용이란 건축가를 알게 되어 <감응의 건축>이란 책을 사서 읽고 직접 무주에 가서 건물들을 보았다. 건물들은 시시했다... 어떤 것을은 조악해보였다. 하지만 그가 건축에 대하여 말한 내용들은 모두가 강렬했고 감동적이었다. 

 

그는 작년 3월 초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올해, 그의 사망 직전 1년을 따라다니며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했다.

'말하는 건축가'이다.

개봉하자마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왔다.

 

그는 말을 한다. 건축에 대해서, 사람과 삶과 죽음에 대해서.

특히 시종일관 그가 보여주는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 진지한 태도가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대장암이 퍼져 성대가 망가졌고 호흡도 가빠서 마이크를 늘 달고 다니면서도 그는 힘겹게 말을 한다. 계속 말을 한다.

게다가 때론 화를 내고 그 쉰 목소리로 소리를 치기도 한다.

 

그가 생각하는 건축은 사람이 주인인 건축이다.

아름다운 건물은 자연과 겸손하게 공존하며 역사와 현재의 삶이 어우러진 건축이다.

그래서 건물은 마을이고 도시이고 역사가 된다. 

 

극장안은 넓은 객석이 텅 빈 채 30명 정도의 관객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주변에 앉은 젊은이들이 수근수근 말한다. 잠깐씩 건너오는 단어들로 보아 아마 그를 존경하는 건축학도인가들인 것 같다. 

그리고 간혹 나와 관객들은 눈물을 닦기도 한다.

 

 

 

 

 

그는 무주군 안성면 면사무소에 주민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요구를 들어서 공중목욕탕을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옆사람이 건축가인줄도 모르고 목욕차례를 기다리는 할머니들과 함께 앉은 건축가의 모습도 나오고 본인이 목욕을 하고 ‘좋다!’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 공설운동장의 스탠드 위에 원래 있던 등나무 올려서 멋진 그늘막이 되게 했는데 등나무가 힘차게 뻗어나가 울창하게 자란 것을 어루만지며 아주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게 말한다.

 

한 주제는 동대문에 있는 옛 운동장을 허물고 세우는 디자인플라자에 대한 내용들이다.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의 설계를 채택했고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서 일을 밀어붙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되고 잠시 공사가 중단되었었다. 변화가 있는 것 같지만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 계획대로라면 곧 개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국내 유수 건축가들의 평을 보면 유감이 많다. 그들의 인터뷰 속에 흐르는 말은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추억과 사랑이다. 나도 새삼스럽게 고등학교 시절 ‘공립 5대 여고 체육대회’를 하러 나가서 응원을 지휘했던 일, 동생이랑 야구경기에 가서 연장전까지 보며 박철순 투수를 목이 쉬도록 응원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과연 모습을 드러낼 디자인플라자는 이런 서울 사람들의 추억과 역사, 사랑을 어떻게 담고 있을까. 만약 정기용의 친구들이 설계한대로 되었다면 그런 것들이 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또 그가 한때 흙건축에 매진하던 장면도 나온다. 그가 흙건축을 좋아한 이유는 이렇다. “건축은 영원하지 않거든요. 어느 정도 쓰고 또 사라지고 새로 짓고. 근데 사라질 때 현대 건축의 문제는 그게 다 쓰레기가 된다는 거. 근데 흙건축은 사라질 때 깨끗하다. 왜? 그냥 흙으로 돌아가버리니까. 어디로 가져갈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그냥 흙으로 돌아가 그런 깨끗한 죽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요양을 하거나 움츠러들기보다 쉬지 않고 말하고, 전시회를 통해 사람들과 말하고 싶어했다.

그는 멀지 않을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내 기억이 완전치 못하겠지만)

“사람은 죽기 전에 철학을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삶은 무엇인지, 가족은, 건축은, 사람은 무엇인지.. 죽기 전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해 봐야한다고.. ”

 

그런데 이렇게 말한 장소가 바로 그의 집이다. 그의 집은 명륜동 다세대주택의 크지 않은 집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집을 다른 책에서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고 했다. 영화를 보니 단지 소유하는 공간만이 집이 아니라 거기서 내다보이는 조망이 다 중요한 건축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석양빛에 발을 모아대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는 태양도 하늘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집은 ‘백만 평’인 셈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말하는 건축가'는 점점 더 쇠약해진다. 눈에 띄게 마르고 기력이 쇠해진다. 그는 자주 말을 끊고 자주 눕는다.

드디어 그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하여 가족과 건축사무소 직원들이 침상을 날라 간 곳은 햇살이 눈부신 경기도 시골의 산자락이었다. 촬영감독은 이날 외출이 갑작스런 일이어서 가져간 아이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기용씨는 그 마지막 봄나들이에서 감상을 이렇게 얘기한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하늘과 바람과 나무, 자연에게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주일 후 2011년 3월 11일 그가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그는 하고싶은대로 했던 마지막 행복한 건축가였다고 말한 친구 건축가가 생각난다. 건축계 현실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씁쓸하다.

그에 대한 추억담이 또다른 '말하는' 건축인인 이용재씨 블로그에도 소개되어 있다.

http://blog.naver.com/leecorb

 

(이상 사진들은 모두 '다음 영화'에서 갈무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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