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터 사랑방

어머니들에게 감사

샘연구소 2012. 5. 5. 15:24

곧 어버이날이다.

아직도 '어버이'란 말은 글에서나 볼 뿐 입으로 옮기면 영 어색하다. 아무래도 '어머니날'이 가슴에 와닿든다.

어머니날을 앞두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하신 외할머니, 큰이모, 작은이모, 우리 엄마, 그리고 작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생각한다.

 

나는 6살때 외할머니가 좋은 학교에서 공부시킨다고 나를 데리고 집을 나와서 외삼촌댁, 이모댁을 전전하며 초등학교를 마쳤다.   

외갓집에서 지내다보니 이것 저것 다 서러움이었다.

밤이면 두어살 위인 식모언니와 둘이 엄마가 보고싶어 입 속으로 이불을 틀어막으며 끄윽끄윽 운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모처럼 집에 가서 엄마에게 억울한 일들을 털어놓으면 엄마는 오히려 나를 야단치고 이모편을 드셨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른이 되어서야 그 마음을 알게 되었다.

이모부는 나를 딸이라며 아빠라고 부르라고까지 하셨고 지금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칭찬하시는지 모른다.

직장생활에, 두 아이에, 살림에, 언니네 딸까지 더부살이로 길러주신 작은 이모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스럽다.

 

외할머니는 육이오때 외할아버지를 잃고 혼자 자녀를 키우셨다.

작은 몸에 곰보였는데 육이오무렵 기독교에 귀의하시면서 한글을 깨쳤고 돌아가시기까지 앉으면 성경읽기, 서면 노동뿐이었다.

비가오나 눈이오나 언덕길을 걸어 교회에 가서 새벽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그 기도에는 늘 빠짐없이 나를 위한 기도가 들어있었다.

할머니 덕에 날이 추워지면 제일 먼저 빨간 내복을 입은 것도 나였고, 양말을 뒤집어 전구를 넣고 천을 깁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도, 사춘기가 되면서 손수 광목을 끊어 생리대를 만들어주신 분도 외할머니였다.

 

큰이모는 엄마 형제중 맏이시다. 한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시고 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의 여전도사를 하셨다. 

어려서부터 큰이모네 집(교회)에 놀러가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중학생 때였나? 수련회 가던 버스에서 노래를 시키자 '갑순이와 갑돌이'를 멋드러지게 부르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대학 3학년 말, 내가 허리를 다쳐 요양차 이모네 집에서 겨울방학을 보냈다. 세수도 못해서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종일 누워 지내던 시절,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좌절하여 날마나 눈물바람이었다. 그때 곁에서 나를 돌봐주시고 기도해주신 이모가 너무 감사하다. 이모는 교회 교인들의 어려운 일에도 늘 함께 하셨는데 교인 장사치를 때면 염하는 일을 도맡아 하셨다.  

결혼 후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이모댁을 자주 방문했는데 중요한 신문기사를 오려두었다가 주시기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사다달라고 청하기도 하셨다. 또 노인냄새가 나면 아이들이 싫어한다고 특별히 향이 좋은 샴푸와 물비누를 주문해서 우리가 가기 전에 미리 목욕하고 머리감고 향수까지 뿌리고 우리식구를 기다리셨다. 없는 살림에도 아끼고 아껴서 여선교사들이나 어려운 일 하는 목회자들에게 후원금을 보내신다. 한 때는 이웃에서 박스를 주워다 파는 할머니를 보시고 나에게 시키셔서 내가 동네에서 폐지를 주워 모았다가 차로 실어다드리기도 했다.

 

작년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제대로 며느리노릇 한 것도 없지만 믿어주시고 사랑해주셨다.

귀하게 자란 부유한 집 외동딸이 큰 농사짓는 집 맏며느리로 들어와 정말 기가 막히게 일만 하셨다. 듣다보면 어떻게 사셨는지 상상이 안 된다. 그래도 돌아가실 때까지 동네에서나 친척들 사이에서 믿음직한 큰 언니 노릇을 하셨다.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항상 단정한 외모에 화장하고 옷가지도 바르게 차려입고 계셨다. 내가 휴일에 세수도 하지 않고 나갔다가 들어오면 옷도 제대로 안 입고 지내는 걸 보시면 아마 기겁을 하실 것이다.

오십이 넘어서도 술담배 좋아하는 남편에게 잔소리를 하시면서 남자에게는 '백 번' 잔소리를 해야 먹힌다며 나를 나무라셨다.

나를 막내딸쯤으로 착각하셨는지 앉혀놓고 주변 며느리들 흉도 많이 보셨는데 나는 정작 딸만큼 못 해드려서 정말 죄스럽다.

돌아가시기 한 1~2년 전부터 시어머니는 살아오던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리고 그동안 입밖에 내지 못했던 한스런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그래서 주말에 시댁에 다녀오면 참 견디기 힘들었고 주말이 가까워오면 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가기 싫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다 내려놓고 훨훨 날아가셨구나 생각하니 오히려 감사하다.

 

딸아이가 그런다. 외할머니는 자기 인생이 없이 사셨다고.

그런 것 같다. 다른 형제자매들 위해 자기 앞길을 포기하고 살림을 돌보았던 일꾼 딸로, 가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한 결혼생활에서 악착같은 살림꾼으로, 그저 지어 먹이고 입히고 뒷바라지 하는 어미로, 이제는 손주들 챙기는 할머니로 살아오셨다.  

내가 오십이 넘으면서 보니 이럴 때 엄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얼마나 아프셨을지, 왜 그때 자식들에게 아무 말도 안 하셨는지 화가 나기도 한다. 하지만 아마 말했어도 내가 귀담아듣지 않았거나 이내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엄마는 '자식들 힘들게 하느니 나만 참으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애써 참으셨을 것이다.  

한때는 늙어서 힘들어하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싫어서 일을 못 하시게 말렸지만 나중에 보니 엄마에게 자식과 손주를 위한 일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싶었다. 그래서 왠만하면 그냥 하시고 싶은 만큼 하실 수 있게 내버려두고 부탁도 하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엄마가 만든 반찬과 바느질, 뜨개질옷을 자식과 손주들이 누릴 수 있을까.

 

 

얼마전 결혼한 딸아이네 집에 갔다가 나오는데 딸애가 택시타고 가라며 돈 이만원을 내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노트북이다 뭐다 해서 가방이 무거운 날이었다. 나는 돈이 있다고 안 받으려 하는데 계속 고집부리지 말고 택시타고 가라고 했다.

나는 그러마고 했지만 정작 나와보니 택시비가 아까워서 아직 아픈 발을 절뚝이며 전철을 갈아타고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택시비를 드리느라고 서로 싸우던 모습이 생각났다.

내가 돈을 드려도 악착같이 안 쓰고 모았다가 손주에게 주시던 엄마의 모습이 겹쳐진다.

 

어느 미국인 연구자가 최근에 웹 문서상에서 쓰이지 않게 된 기본단어들을 조사했는데 그 중 하나가 'sacrifice 희생'이었다고 한다.

봉사는 넘치지만 희생은 거부하고, 나눔은 많이 해도 스스로 내어줌은 하지 않는 시대.

 

이제는 하나 둘 하늘나라로 가시는 어머니들,

잠시 땅에 내려온 천사들,

 

할머니, 큰이모, 작은이모, (시)어머니,

그리고 우리 엄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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