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

샘연구소 2012. 5. 17. 10:44

MBC라디오에서 <여성시대> 작가로 활동중인 교육학 전공자 김이윤씨의 <두려움에게 인사하는 법>(창비)이란 책을 읽었다.

 

두려움...

우리들에게 두려움은 어떤 것들일까?

 

 

이야기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2학년의 사내아이 같은 '여여'라는 여학생이다.

여성주의 사진작가인 엄마와 둘이 살고 있다.

공부를 잘 한다.

'세미'라는 단짝친구가 있다. 그는 '여여 군', 친구는 '세미 양'으로 불리운다.

그냥 고개를 돌리면 있을 것 같은 그런 17세의 소녀이다.

 

 

여여.

여여는 아빠가 없어서 화가 나고 슬프다.

 

"친구네 엄마가 '아빠는 뭐 하시니?'하고 물을 때도 정말 곤란했다고. 아빠가 있어야 대답을 할 거 아내. 친하지 않은 친구네 집에서는 '아빠는 회사 다녀요. 에이. 중소기업이죠 뭐. 평범한 샐러리맨이에요.' 이렇게 말하고, 좀 친한 친구거나 많이 배운 부모 같아보이면 '엄마랑 아빠랑 이혼하셨어요. 보수적인 집안의 종손인 아빠와 갈등이 많아서요. 엄마는 사진작가예요. ....'

 

이런 식으로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왔다.

이혼한 엄마도 비슷했을 것이다. 일하는 여성으로 숱하게 "남편은 뭐 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았을 것이고 딸처럼 똑같이 안 친한 사람에게는 적당히 직장인이라고 둘러댔거나 좀 친한 이에게는 그냥 이혼했다고 하거나... 했을 것이다. 그 불편함.

그리고 딸에 대한 사랑과 확신, 미안함과 혼란스러움이 교차했을 것이다. 딸의 집요한 말다툼 끝에 엄마도 고백한다.

 

"나도 살면서 너와 똑같은 의문을 품고 살았어. 나도 온통 물음표였어. 나는 왜 여여를 낳았을까, 여여의 아빠를 사랑한 건 맞을까, 여여에게 미안한 일을 한 건 아닐까? 어떤 날은 모든 게 분명했어. 나는 여여를 원했고 네 아빠를 사랑했고 세상이 두렵지 않았어. 그런데 어떤 날은 모든 게 혼란스러웠어."

 

하지만 엄마는 변함없이 당당하다.

 

"나는 네 아빠를 오래 사귀었고, 우리는 사랑했어. 그건 의심하지 마."

"난 네가 딸인 걸 안 순간부터 아무 걱정 안 했어. 적어도 남자들처럼 바보 같지는 않을 거고, 더구나 내 딸이잖아. 멋있는 여성으로 키울 자신이 있었어."

"네 아빠인테 이런 말 하는 거 미안하지만, 나와 너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왜소한 남자였어."

 

딸은 여전히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채로 엄마와 화해한다. 그러나 아빠가 너무나 궁금하다. 만나고 싶어서 참을 수 없다. 매일 학원에 차로 태우고 다니며 공부를 닥달하는 엄마를 가진 세미가 부럽고, 남동생과 변기사용법으로 짜증내는 세미가 부럽고, 돌아가신 아빠 사진을 보여주며 그리움에 눈물흘리는 친구가 부럽고 아빠와 손잡고 가는 아이들이 다 부럽다. 그러던 차에 하필 외부인 특강으로 그 아빠를 만나게 된다. 물론 그이는 자신의 딸인 줄 모른 채로. 생각보다 그이는 참 찾기 쉬운 자리에 있었다. 인터넷 덕에 금세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아빠를 찾아가야 하나? 찾아가서 '아빠!'하고 부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아빠는 결혼했을까? 아이는 있을까? 엄마와 나를 잊지 못해 싱글로 살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 그럴 것이다. 아빠는 어디선가 들려올 자신의 딸로부터의 신호를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시게 된다. 파주에서 요양을 하는 동안 혼자 학교를 다니면서 고3 오빠에게 마음이 끌리게 된다. 같은 문화센터에서 드럼을 치다가 만나면서 작은 설레임도 느낀다. 그건 사랑일까? 세상은 온통 그에 대한 관심과 끈으로 가득하다. 어디가나 그를 찾게 되고 그를 느끼고 싶어진다. 그에 대한 시청각적 기록들은 모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내 안에 남는다. 글을 읽으며 고교시절 교회에서 집까지 나를 바래다주던 오빠들, 그이도 희미한 가로등 밑에서 손을 흔들며 돌아서 갔던가? 문학소년이나 청소년시인같은 글들로 주고받던 편지들... 은근히 가슴이 콩닥거렸던 기억들이 어슴프레 떠오르기도 했다.

엄마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어간다. 여여는 신자도 아니면서 성당에 들어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하느님, 제 목소리 들리시지요? 하느님은 귀가 엄청나게 크실테니, 제 마음의 소리까지 다 들으실 테죠. 엄마가 많이 아파요. 엄마를 구해 주세요. 세상에 공짜가 없다면, 제 수명에서 십 년을 가져가세요. 저의 십 년을 엄마에게 얹어 주세요. 제 바람은 그거예요. 제발요...

 

나는 다행히 시부모님도 친부모님도 여든, 아흔을 넘도록 장수하고 계셔서 이런 기도는 안 해봤다. 하지만 딸을 기르면서 아플 때 내가 대신 아프게 해달라는 기도는 수도 없이 해봤다. 그러니 세상에 엄마 밖에 없는 아이인 여여가 이런 기도를 한 건 너무나 당연하다.

한편 단짝친구 세미 양과 함께 아빠 서동수씨-대기업 이사를 '멘토'로 요청해서 승락을 얻으면서 직접 만나 대화도 나누게 된다. 용기를 내어 당돌한 질문을 한 세미라는 학생에게 그는 결혼도 경제논리로 설명한다. 소위 '가격 대비 성능'이론이다.

 

"배우자나 연인을 선택하는 데는 여러가지 요소들이 영향을 주지만, 단순화시키면 모든 선택에는 어떤 식으로든 경제논리가 개입합니다. 아, 여러분이 인터넷 쇼핑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로 하면 '가격 대비 성능'같은 거예요. 물건을 살 때처럼 사랑을 선택할 때도 수많은 요소들을 고려하죠. 그 사람의 외모, 성격, 경제력, 집안 배경, 유머, 부드러움, 결단력, 나에 대한 충성도 등등 여러가지를 따져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점수를 매기는 겁니다. 평균을 내기도 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 가산점도 주면서 다각도로 계산한 후에 비로소 선택을 하는 거죠. 아마 저도 아내를 그렇게 선택했을 겁니다.

 

그렇다. 그는 그렇게 늦게 결혼을 해서 딸도 있었다. 외발자전거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인생을 외발자전거 타기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온 몸으로, 온 힘을 다해 굴려야 하고 뒤로 갈 수도 있다나... 세미는 묘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아빠가 사는 동네를 다녀오기도 하고 그이의 말대로 '외발자전거'도 타기로 한다. 그리고 마음을 설레게 하는 선배오빠 '시리우스'가 외발자전거를 붙잡아주는 생일선물을 선사한다. 주말에 암투병하는 엄마를 방문하는 일까지 미루며 시리우스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험도 우선순위가 되지 않는다.

 

시험 범위를 복습하는 게 아니라 시리우스와의 추억을 복습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느라 시험 셋째 날까지 대체 뭘 하며 보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고3. 수능을 앞두고 결국 여여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여여는 현실앞에 마주한다. 그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를 정리해나간다.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시리우스를 생각하는 게 아니야. 나는 수학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수학을 놓으면 안 돼.... (중략) ... 수학을 놓으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수학을 놓으면 안 돼, 수학을 놓으면 안 돼.'가 어느 새 '시리우스를 놓으면 안 돼. 시리우스를 놓으면 안 돼.'로 바뀌고 있음을.

 

아무리 잊으려해도 머리속도 세상도 그의 생각으로 그와의 추억으로 가득차있다.

이렇게 외롭고 힘들 때 여여에게 세미는 늘 소중한 단짝친구다. 약사아버지를 둔 덕에 약도 주고 대화상대도 되어준다.

중고교시절 여자아이들은 왜 꼭 단짝친구를 갖게 될까. 나에게도 중학교 때 늘 같이 등하교 하던 친구들, 고교시절엔 연애편지같은 편지를 주고받던 데미안과 싱클레어같은 단짝친구가 있었다. 세미와 여여는 더 나아가서 '피의 맹세'까지 한다.

그런 건 연애감정같은 건 단짝 친구인 세미에게도 말할 수 없다! ^^ 하지만 학교에서 또래상담자 교육 때 배운 '어기역차' 대화법(청소년상담원에서 비폭력대화, 감정소통 등 여러가지 의사소통기법을 기반으로 개발한 간단한 대화법)이 조금은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하... 그리고 여여는 마침내 이런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시리우스에게 하는 말이지만 수신번호는 자기 자신의 핸드폰이다...)

 

내 마음이 너에게 가 얹히고 싶었던 건 마음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몰라서였어. 나도 나를 모르던 어느 날에 네가 나에게 와 준 걸 감사해. 한동안 최면에 걸린 듯 아름다운 시간이었어. 어른이 되기 전에 그런 감정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참 멋진 말이다. 나도 내가 마음을 '얹었던' 시리우스들에게 그와 똑같은 말을 건네고 싶다.

 

엄마의 암은 막바지로 치닫고 둘만의 이별여행을 계획하던 여여는 공교롭게도 아빠인 서이사가 준 호텔이용권으로 여행을 하게 된다. 거기서 엄마는 유언이 될 마지막 말을 해준다.

 

"응, 그래, 만점이야. 여여, 그 이름처럼 살면 돼. 언제나 자기 자신이 제일 소중해. 자신이 소중하면 자기 몸과 마음을 아무렇게나 하지 않아. 엄마가 있든 없든, 가난하든 넉넉하든, 슬프든 기쁘든, 언제나 소중하게 귀하게 자기 몸과 마음을 위해 주어야 해. 그러면 좋은 사람은 저절로 되는 거야."

 

그리고 아빠 이야기로 실랑이 끝에 딸 여여는 이런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그래, 나는 사랑 속에 태어났어. 그건 변함없어."

 

엄마가 여여에게 해준 마지막 말은 나 역시 내 딸들에게 해주고 싶다. 아마 소설처럼 근사하게는 못했지만 비슷하게는 수도 없이 말했을 것도 같다.

 

"그래, 네 안에는 빛이 있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모으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빛이 답을 가르쳐 줄 거야. 어둠 속에 있을 때도 빛은 너를 이끌어 주고, 네가 밝음 속에 있을 때도 반짝이면서 잘하고 있다고 알려 줄거야. ...... 네 안에 살고 있는 그 빛을 뭘하고 하면 좋을까?

"음, 발광 바이러스는 어때? 빛을 내는 바이러스가 내 안에 살고 있는 거야."

"오, 역시! 우리 여여는 천재라니까. 그래, 네 안에 있는 발광 바이러스. 그걸 잊으면 안 돼..... 빛나라, 발광 바이러스야, 얍!"

 

발광 바이러스야, 얍! 짧기도 한 엄마의 유언.

그러나 모든 엄마들이 딸들에게,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

엄마를 보낸 여여는 슬픔 속에 아빠 서이사를 만나 한강에 종이배를 띄운다. 그 종이배엔 이렇게 썼다.

 

나의 뿌리여, 안녕!

내가 잘못한 거 다 용서해 줘. 엄마,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렇게 엄마가 말한 것처럼 두려움이었던 죽음은 소통과 화해, 용서를 가져다 주었다.

청소년기의 우정, 사랑, 가족과 여러 이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

딸을 가신 싱글맘들에게, 또 싱글맘의 딸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줄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청소년과 엄마들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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