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중학교 여자아이들의 세계

샘연구소 2012. 7. 10. 00:12

우아한 거짓말

 

제목을 대하면서 이게 과연 청소년을 등장인물로 한 소설의 제목인가 싶었다.

소설 <완득이>를 쓴 김려령의 최근 장편소설이다.

며칠 전 사춘기 청소년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되는 재미난 책, 영화들은 다 남자만을 소재로 했네... 내가 남자 이야기만 골라 읽고 보나? 했는데 이건 사춘기 여학생들의 생활과 관계, 마음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이야기다. 교사, 학교사회복지사, 상담사, 엄마들에게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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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중학교 1학년 열네살의 '천지'라는 여학생이다.

아니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사라진다. 죽었다. 자살이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얽힌 실타래를 풀듯이, 영화 화면이 fade in 하듯이 이야기를 풀어간다.

 

아이는 있는 듯 없는 듯, 최고는 아니지만 공부를 못 하지도 않는, 똘똘하지만 멍청한, 알고서도 당하는 착한 왕따였다.

그리고 견디다 못해, 일부는 복수심에서 자살을 택했다.

 

천지를 괴롭힌 아이는 같은 반 친구 '화영'이다.

그리고 주변에서 방조하거나 편들었던 모든 친구들이다.

하지만 알고보면 화영이도 외롭고 사랑받고 싶었던 아이였다.

사춘기의 여자아이들은 덫에 걸린 듯, 무엇에 홀린 듯 무리에 쏠려서 한 아이를 사지로까지 몰고 갔다.

어른들은 알아도 챙기지 못했거나 알지도 못 한 채 각자 바삐 살아갔다.

 

화연은 천지와의 기억이 유쾌하지 않았다. 천지는 남 주자니 싫고 가지자니 더 싫은, 그런 친구였다. 친구, 그만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니야."하는 동정틱한 우아한 말로 우쭐함을 누리는 재미와, 이상한 애라는 말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끝내 이상한 애로 몰아붙이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왕따를 시킨 주동자인 화연의 독백이다. 왕따 시키는 방법도 점점 고단수가 되어갔다. 예를 들면 생일잔치에 초대한다고 일부러 1시간 늦게 부른 다음 다른 아이들이 있는 앞에서 찌꺼기같은 음식을 먹이는데 천지 입장에서는 안 갈 수도 없고 안 먹을 수도 없는 것이 그래봐야 "초대했는데도 안 왔다.", "음식 대접했는데도 안 먹고 갔다."라며 오히려 나쁜 말을 더 퍼뜨릴 핑계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생일을 앞두고 선물을 교환하자고 화연이 제시한 '절친각서'가 천지를 이렇게 몰고가게 되었다.

 

선생님도 처음 마음은 다부졌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정확하다. 선생님은 결국 모르거나 적절히 개입하지 못했다. 그래서 천지 엄마에게 "제가 애들만큼 힘들겠어요.....(중략)  나는 정말 뭔가 다른 선생님이고 싶었는데, 잘 안 되네요."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초짜' 교사를 보는 눈은 이렇다.

 

아이는 선생님이 아직 초짜라 의욕만 왕성하다고 했다. 저런 선생님한테 잘못 걸리면 재수 없다. 한 대 맞고 끝날 일도 괜히 크게 벌인다. 하지만 딱 삼 년만 지나면 사랑으로 감쌀 일 매나 벌로 감싸고, 매나 벌로 감쌀 일 무관심으로 감쌀 거라고 했다. 놀라운 건 글 아래로 많은 동의 댓글이 달렸다는 것이다. 사명감 불타는 초짜 선생님의 딱지를 떼는 통과의례가 있는데, 아이들은 그것을 '정신줄 놓고 패기'라고 했다. 자기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며 줄줄이 써놓은 글을 보고 선생님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천지 엄마는 혼자서 마트에서 식품 코너를 지키며 두 딸을 키운다. 천지 아빠는 일찌감치 사고로 사망. 동네 양아치같은 남자가 엄마를 찝적거린다. 하필 그 남자가 천지와 언니 만지의 단짝 친구인 미란이, 미라의 아빠일 줄이야.

 

엄마와 언니는 천지가 죽기 전 이해할 수 없게 비싼 MP3를 생일선물로 사달라고 조른 일이 캥긴다. 심상치 않다. 만지는 엄마가 답답하다. 그래도 엄마는 당당하고 씩씩하다. 슬퍼도 꾸역꾸역 밥도 잘 먹는다. 오랫동안 슬퍼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주도면밀하게 화연이 엄마를 찾아가서 할 말을 하기도 하고 나름의 복수로 MP3를 건네기도 한다.

천지의 언니 만지는 속상한 마음에 엄마한테 화풀이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 엄마 마음이야 오죽 하랴...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며? 근데, 엄마는 안 그런 거 같아. 그날 다 흘려보낸 것 같아."

"가슴에 묻어? 못 묻어. 콘크리트를 콸콸 쏟아붓고, 그 위에 철물을 부어 굳혀도 안 묻혀. 묻어도, 묻어도, 바락바락 기어 나오는 게 자식이야. 미안해서 못 묻고, 불쌍해서 못 묻고, 원통해서 못 묻어."

엄마는 맨밥을 듬뿍 퍼서 우걱우걱 먹었다.

"남편 목 없는 년은, 자식 복도 없다더니....."

"근데, 엄마. 부모 복 없는 애는 .... 친구 복도 없어."

 

오래 전 지오디란 남성그룹가 '어머님께'란 노래 중에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고 노래했다. 하지만 천지 엄마는 툭 하면 짜장면을 사먹는다. 천지는 그게 싫었다. 투덜대는 천지에게 엄마가 말했다.

 

"천지야, 속에 담고 살지 마. 너는 항상 그랬어.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잘해도 싫어요, 소리는 못 했어. 만약에 지금 싫은데도 게속하고 있는 일 있으면, 당장 멈춰. 너 아주 귀한 애야. 알았지?"

 

엄마에게, 그것도 '남편 복 없는 여자'인 엄마에게 자식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할까.

부모라면 공부 잘 하고 내 말 잘 듣고 집안일 돕는 아이보다 나가서 남들 앞에 당당하기를 바라는 게 가장 큰 소원이다.

천지는 "신은 정말 있을까? 있으면 왜 나쁜 사람들을 그냥 둘까?"하며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얘는, 그래서 잡아가는 사람도 만들었잖아. (중략) 괜히 애써 무겁게 살지 마. 산다는 거 자체가 이미 무거운 거야. 똥폼 잡고 인생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들, 아직 인생 맛 제대로 못 봐서 그래. 제대로 봐봐, 웃음밖에 안 나와."

(중략)

'기집애야, 나한테는 니들이 신이고 종교였어.'

 

그렇다. 아이들은 모든 엄마들에게 신이고 종교이다...

한편 언니 만지는 집요하게 천지의 죽음을 몰고간 과정과 관계들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들어간다.

 

주도하거나 부추기거나. 지켜보거나 눈감거나 상황을 즐기거나...... 어떻게든 하나가 된 아이들.

"너희들이 천지를 가지고 놀았어...."

 

이게 만지의 결론이다. 하지만 만지는 주동자인 화연을 지키기 위해 뒤를 밟는다. 그래야 천지의 죽음이 더 억울해지지 않을 것이므로. 화연이 죽는다면 만지 자신이 죽어서라도 2:1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화연은 천지가 죽고 친구들도 외면하자 다른 엉뚱한 일을 해서 자기 부모를 괴롭히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만지에게 들킨다.

만지와 화연, 미란과 미라, 미소, 위기의 노도가 넘실대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 같은 청소년기의 여학생들...

잘 되겠지...  결국은 잘 살겠지? ...

 

혼자서 하던 뜨게질 실을 풀어 용서의 편지를 실패로 삼아 죽기 전에 나눠준 천지.

엄마, 언니, 그리고 자기를 괴롭혔던, 유서가 된 편지를 받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두 친구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롭고 괴로운 마음을 달랠 때 피난처가 되어준 도서관에게.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이 땅의 엄마들,

남편 복 없는 엄마들에게 화이팅!

그리고 부모 복 없는 딸들에게 화이팅!

 

외롭고 괴로운 여학생들아,

너무 힘들면 엄마에게, 선생님에게, 사회복지사나 상담사에게 말하고 매달려라. 요청해라. 너희들의 권리야.

서로 할퀴고 물어뜯고 피흘리지 말아라. 제발...

 

얘들아,

무엇보다

살아남아라.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라.

그리고 웃어라.

그게 복수란다.

사랑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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