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향과 이슈

강점 관점

샘연구소 2012. 10. 27. 18:41

한 소년을 만났다.

중3. 16살. 남자.

 

어려서 경기도 시골 벽지를 이사다니며 살았다.

부모님은 초등학교 때 이혼하시고 시골의 친할머니 할아버지와 산다.

집에는 컴퓨터가 없다. 핸드폰도 없다. 잃어버렸는데 안 사주셔서...

공부는 잘 못 한다.

체격 좋고 웃는 낯에 선선하게 잘 생겼다.

 

이 정도이면 어떤 아이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이런 저런 나쁜 일로 학교에서는 칭찬받지 못하는 말썽꾸러기다.

가끔씩 무단결석을 했는데 얼마 전에는 아예 1주일간 학교를 안 나왔다.

핸드폰이 없으니 연락도 안 되었다.

기다리다 못한 담임교사가 1주일만에 가정방문을 했다. 아이는 멀리 가지 않았다.

근처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가 있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그냥 좀 쉰 것이다. 흐흐... 

아이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학교에 다시 다니고 있다.

 

그 아이와 마주쳤다.

'와우! 난 멋진 남자에 약해!... '

"너구나!" 아이와 마주 앉아 팔씨름을 했다. 셌다. 그리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아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는 한번도 눈을 피하지 않고 대응했다. 에너지가 있다. 좋다.

나에게서 '난 네가 좋다'라는 메세지가 아마 그에게로 흘러갔으리라.

그 아이에게서도 '나도 당신이 좋다'라는 메세지가 흘러왔다.

 

내가 물었다. "넌 무슨 재미로 사니? 뭐 좋아해? 잘 하는 게 뭐야? 운동? .."

아이는 없다고 했다. "없다. 모른다. 그저 그렇다..." 늘 그런 대답이지.

그래서 숙제로 내주겠다고 했다. 하나 정도 예를 들어서 물꼬를 터주었다.

 

잠시 후 아이가 가정통신문 뒷면에 꼬불꼬불한 글씨로 휘갈겨쓴 '내 장점(잘 하는 것) 목록 20가지'를 적어왔다.

 

1. 술을 안주없이 2병 정도 마실 수 있다.

2. 담배를 5개피 줄줄이 할 수 있다.

3. 다른 사람들과 잘 친해진다.

4. 아는 사람들이 많다.

5. 다른 지역 사람들도 친하다.

6. 착할 땐 착하다.

7. 장이 좋다(변비, 설사 없다)

8. 잠 자는 것

9. 양손잡이다.

10. 책읽기

11. 힘 쓰는 것

12. 먹는 것

13. 떠드는 것

14. 기다리는 것

15. 가끔 상대방 마음을 잘 알아낸다.

16. 영화 보고 느끼기

17. 운동하기

18. 잘 웃는다.

19. 라면을 잘 끓인다.

20. 잘 참는다.

 

 

"숙제를 되게 빨리 해왔구나!"

하나하나 아이와 읽어보고 보충설명을 들었다.

술은 자주 먹지는 않고 담배는 많이 줄였다고 했다. 돈이 없으니...

쓰지 않았지만 아이는 심심해서 혼자 멍청히 생각하기를 가장 잘 한다고 했다.

게다가 아이가 기다리는 것, 잘 참는 것, 라면 잘 끓이는 것을 잘 한다고 한 부분에선 내심 안쓰러웠다.

 

잘 자고 잘 먹고 잘 싸고 잘 노니 되었다.

잘 떠들고 잘 웃고 잘 기다리고 잘 참으니 더욱 잘 되었다.

 

책을 좀 보기로 했다.

아이가 볼 만한 책은 학교도서관에도 있겠지만 내가 몇 권 사서 소포로 보내주려고 한다.

그 아이가 좋아서..

또 보고 싶다.

그녀석도 어쩌다 한 번쯤 내 생각이 날 것이다. 그리고 씩 웃을 것이다. 내가 보고 싶을 것이다.

 

 

 

담쟁이가 그린 벽화

아이들도 이렇게 잘 자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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