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김선우 산문 중

샘연구소 2014. 3. 3. 17:57

만지기 위한 책

- 김선우 산문집 <물밑에 달이 열릴 때> 중 독후감 형식으로 쓰인 3부에 실린 한 꼭지임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하이네, 브레히트, 내루다 / 김남주 옮김

 

 

책은 사람에 의해 잉태되고 자라고 죽음을 맞는다. 동시에 '어떤' 책은 사람을 잉태하고 젖을 물리고 자라게 한다. 여기 한 권의 책이 있다. 작가도 사라지고 수배지의 어둠과 싸우며 이 시편들을 번역한 이 땅의 시인도 사라지고 출판하도 사라진 책. 한 권의 책에 관계된 모든 것이 죽음 저편으로 사라진 뒤에도 오래도록 내 서가에 이 책은 꽂혀 있다. 오월이 오면, 나는 이 책을 다시 뽑아든다. 활자의 룰을 따라 '읽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지기' 위해, 참혹한 어둠 속에서 잉태된 낡은 겉장에 손을 얹고 이 책이 나를 때리던 상처의 기억을 향해 손을 내민다. 오늘을 묵상하기 위해, 꿈꾸기를 거세당하지 않고 미래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이 시들을 읽어주기 바랍니다"라고 시인 김남주는 쓰고 있다. 책의 초판 발행일인 1988년 8월 그는 9년째 감옥에서 싸우고 있었다. 싸우는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앞의 생과 싸우는 전사들이다. 꿈꾸기 위해, 자유로워지기 위이해, 행복해지기 위해, 삶에 대한 사랑이 유무형의 폭력과 맞닥뜨려질 때 지독한 분노와 증오와 싸움이 촉발된다. 그리하여 시대와 나라는 다르더라도 부조리와 폭압의 현실 앞에 아름다운 전사들이 있었다.

하이네는 쓴다. "거인 안테우스는 그의 발이 어머니인 대지에 닿아 있는 동안에는 막강한 힘을 쓸 수 있지만 헤라클레스가 그를 들어올리자마자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대지를 떠나지 않는 한 막강한 힘을 내지만 공상에 빠져 푸른 하늘을 떠돌아다닌다면 그 순간 무력해지고 말 것이다." 브레히트는 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네루다는 쓴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 만한 우주도 없다"라고.

너무도 명백한 폭력의 시대가 이 땅을 시시로 훑고 갔다. 진실로 살아 있기를 원했던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이름 앞에 살해당했다. 시인 김남주도 그렇게 죽었다. 이제 우리는 그때를 단지 '그 시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냉소의 이름이든 회한이나 야합이나 대중추수의 이름이든, 인간 정신의 점진적 '죽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 살아남으라고. 살아서 세계의 무의미와 싸워야 한다고. 그러나, 불행히도, 세계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저질러온 너무도 많은 죄 - 의미들이 들끓고, 죽을 때까지 싸워도 무의미에 도달할 수 없을지 모른다. (209-211 글 전부임)

    

 

 

겨울동안 찬란한 봄날의 볕을 꿈꾸었을까?

꿈꾸던 꽃눈 잎눈들이 부시시 기지개를 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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