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M. 스캇펙

샘연구소 2014. 3. 6. 13:05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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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과 성장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 항상 행복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편안해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유는 배움, 즉 다시 말해 진화해가기 위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진화’라는 것은 발전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배우게 되면 우리는 퇴보와는 반대되는 개념인 진보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 인간이 배움을 행하는 데는 이 세상보다는 좀더 이상적인 환경이 있을 것이라고 당신이 상상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우리의 삶은 변화와 불확실성과 이해하기 힘든 과목들로 가득 차 있다.

우울한 기분에 빠져 있을 때 바라보면 인생은 천상으로 향하는 신병 훈련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내가 인용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들이 우리의 스승이다.” (125)

 

 

그러한 사건 속에서 우리가 신의 지문-실제 손에 있는 지문이 아니더라도-을 볼 수 있다고 결론 내리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입장은 카를 융과 아주 비슷하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영화에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대담자는 융에게 묻는다.

“신을 믿으십니까?”

그 당시 83세였던 융은 파이프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뱉고는 이렇게 말했다.

“신을 믿느냐고? ‘믿는다’는 말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없을 때 사용하는 말이지. 아니, 난 신을 믿지는 않아. 나는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125)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자기 실현 self-actualization'이란 용어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사회심리학적이고 영적인 기능, 자율성 그리고 그 외의 개인적 역량의 수준 등을 최고로 만들기 위해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은 생존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지게 되면, 더 차원 높은 인식 수준을 지향할 수 있다고 매슬로는 말한다.

나는 매슬로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은 많지만 ‘자기 실현’의 개념에는 이의를 제기하려 한다. 나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창조할 수 없는 것처럼, 자아 실현을 이룰 수 없다고 믿는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보고 즐길 수 있도록 신이 만들어 놓은 정원을 가꾸는 일일 뿐이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그것을 잘 가꾸거나 잘못 가꿀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성장하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공동 창조자가 될 수 있지만, 성장을 거부한다면 신과 함께 하는 공동 창조자의 역할을 거부하는 게 되는 것이다.(128)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대부분의 배움은 ‘수동적’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일은 그냥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129; 이후 136까지 파블로프, 아서 코에슬러, 해드스타트 프로그램, 에리히 프롬, 역할 모델, 메타무드, 조나단 스위프트 등에 대해 비판하거나 옹호하면서 어린이 시기의 배움과 성장에 대해 자세히 논한다.)

 

순수한 의미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성장하는 사람이다. (138)

 

무언가를 기꺼이 배우려는 태도는 상당 부분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을 포함한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이런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놀랄만한 업적을 이루고 방대한 양의 지식을 습득했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고통은 자신의 내부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의 내부에서부터 이미 배움은 시작되는 것이다.”(141)

 

겸손은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아는 것을 의미한다.(148)

 

성숙한 정신 건강을 유지하려면 유연성이 필요하다. 상충되는 욕구와 목표, 의무 그리고 책임감 등에서 끊임없이 미묘한 균형을 맞추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 이러한 균형 맞추기 훈련의 본질은 새롭게 습득된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서 새롭게 다시 배우기를 해야 되며, 우리 안에 이미 고착되어 있는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이다. (161)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는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란 뇌가 손상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용기란 두려움이나 고통을 느끼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당신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용기 있는 행동을 하게 되면, 당신은 더 강해질 뿐만 아니라, 성숙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173)

 

결과적으로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결심을 하는 한 죽을 때까지 무엇을 배울지를 선택해야 된다. 수피 무슬림인 이드리스 샤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그저 공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선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공부하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언제 공부하고 또 언제 공부하지 않을 것인가. 누구와 함께 공부하고 누구의 지도를 받지 않을 것인가도 결정해야 된다.” (176)

 

내가 거의 매일 기도하는 내용은 내가 노년기를 더 잘 준비할 수 있게 하고 내가 가진 어떠한 지배력도 포기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미 그렇게 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배움의 노력이 중단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84)

 

 

 

 

현대무용가안무가 피나바우쉬 다큐영화 '피나' 중에서

http://movie.daum.net/moviedetailPhotoView.do?movieId=63307&photoId=802961#movieId=63307&photoId=802963&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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