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eless Society,- Community and its Counterfeits
(돌봄없는 사회 - 공동체와 그 위조품들)
(by John McKnight)
중 제1장 Professionalism를 읽고
연구원 이태인 씀
Careless Society.
1995년에 나온 책이니 20년이 넘은 오래된 책이지만 읽으면서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것 같을 때가 많다.
나는, 다른 것보다 저자의 이 문제의식에 끌리고, 취한 줄도 모르던 술이 깨는 느낌으로 읽어나간다. 문제의식이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 원론적 질문들, 잊어버렸던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장을 읽다보면, 사람을 케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케어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또는 욕구(needs)를 누가 정의내리는가, 전문가주의가 누구를 가장 이롭게 하는가, ‘전문가’가 케어를 제공했을 때 그것이 케어받는 이에게 진정 이로운가, ‘전문가’가 지역사회공동체의 전통적 케어를 대체할 수 있는가, 지금 이대로의 전문가주의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가 등의 원론적 질문들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질문들은, 답을 찾는 것보다 질문을 던지는 자체에 더 큰 의미가 있어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사회적 통념을 흔들며 응답자로하여금 원론부터 따지며 성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사회복지, 심리상담, 교육, 의료분야 등을 포괄하여 지칭하는 휴먼서비스 분야에서 ‘욕구’를 정의내리는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생각해본다. 사회복지계에서는 클라이언트라고 불리는 서비스 소비자들이 그들의 욕구에 대해 스스로 정의를 내린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진정 그러한가? 실상 클라이언트의 욕구는 ‘전문가’들이 명명한 어떤 것인 경우가 많다.
저자 McNight은 전문가에 의해 새로운 ‘욕구’가 창출되어짐을 애도상담(bereavement counseling)을 예로들어 설명한다. 과거에는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면 그 상실에 대한 애도는 지역사회공동체의 공동소유가 된다. 따라서 가족, 친구, 종교인들, 이웃들이 함께 슬퍼하고, 함께 고유의 문화적 의식을 치르면서 돌아간 사람의 삶을 기억하고 추억을 나누었다. 그러다보면 남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나갈 용기와 힘을 얻었었다. 이랬던 지역사회에 애도상담이라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가’가 등장하면서,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은 졸지에 애도상담이 ‘필요한’, 그러기에 ‘부족한’ 또는 ‘결함이 있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전문가’는 애도상담이 대학에서 애도상담 교육을 받은 전문가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권위’있게 말한다. 애도상담가가 ‘필요한’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은 더이상 함께 애도하지 않고 상담가에게 애도를 전문적으로 다루도록 맡긴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뿐 아니라, 아픔, 늙음…이런 경험들은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나갈 수 있는 삶의 과정으로 이해되었던 일들이다. 현대사회에서 늙음을 얼마나 큰 문제로 여기며 늙음을 전문적으로 다루느라 얼마나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지…라고 쓰고 ‘얼마나 많은 직업을 창출시키는지’라고 읽는다.
마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생태계와 사람에 대한 케어가, 어느새 전문가에 의한 서비스로 대체되면서 지역사회에서 세대간 전수시키며 보유해오던 고유의 지식과 지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빈 자리에는 신기술의 이름으로 탄생한 독점적 지식, 생태계와 맥락을 무시하는 하나의 담론이 똬리를 튼다. McNight은 이를 사막화라 부른다. 다양한 마을들이 왕성하던 곳에 황폐한 사막의 모래바람만 날린다는 것이다. ‘전문성’이 지역사회공동체를 대신할 수 있는가? 상담을 받는 사람은 전문가가 친구인 줄 알고 상담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하지만, 상담가가 친구를 대신할 수 있나? 상담을 받아 좋으면서도 정체불명의 공허를 느꼈던 것이 떠오르고, 상담을 ‘받는다’는 말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묻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복지라는 것이 얼마나 생태계와 공동체의 자생력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발달’해 온 것인가? 라고.
특정서비스를 개발하여 명명함으로써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내고, 그것을 시장에서 유통시키고, 그 서비스의 유통에 대한 권한은 특정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갖는 방식의 전문가주의가 휴먼서비스 분야의 기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이런 양상은 사회복지, 심리상담, 의료, 교육 등의 서비스직종에 공통으로 존재하는데, 이런 전문가주의는 처음에는 사람들의 문제를 완화하고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 시작되었겠지만 궁극에는 클라이언트들이나 지역사회보다는 전문가들의 필요를 바탕으로 하며, 주민과 지역사회보다는 전문가집단의 이익을 위해 새로운 결핍을 명명하는데 그들의 전문지식을 적용하고 해소법 또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분리하며 정치사회적 행동을 통해 정책과 제도, 예산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결국 자신들의 웰빙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계, 로봇, 해외의 값싼 노동력에게 넘겨져서 생산직 일자리가 대거 사라진 노동시장의 공백을 휴먼서비스분야가 팽창하여 메꿈으로써 실업으로 인한 혼란을 막고 국가의 GNP(국민총소득)를 증가시켜야 했던 사회경제적 욕구와도 맞물려 있다. 읽는 내내 지식생산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푸코의 통찰을 떠올리게 된다.
휴먼서비스를 통째로 부정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분야들의 방향성, 가치와 목표에 대해 원론적 질문들을 던져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또 다른 ‘전문가’의 목소리가 울림있게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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