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영화 가버나움

샘연구소 2020. 3. 19. 11:03

`가버나움` Capernaum.


가버나움은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호수 북서안의 작은 마을 이름이다. 북쪽으로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아래쪽으로는 지금은 이스라엘과 동쪽으로 요르단이 위치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다니면서 서북쪽 호수가인 이 마을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병든 이, 약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기적을 행했다. 예수는 그가 나고 자란 나사렛이나 베들레헴, 그리고 수도인 예루살렘보다도 갈릴리 지방을 제2의 고향이라 여기고 30세부터 죽기 전까지의 공생애를 주로 이곳에서 생활했다. 갈릴리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 현대식으로 말하면 이민자나 떠돌이, 난민들이 많아서 가난하고 못 배운, 유대교의 법률이나 종교지식도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예수는 이곳을 사랑했고 죽은 뒤 부활해서도 갈릴리 호수가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예수는 이 마을이 멸망할 것을 예언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6세기경 퇴락하여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지순례자들을 위해 무너진 회당 터, 베드로의 집, 그리고 몇몇 동상들이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은 지금도 바람잘날 없는 피와 눈물의 분쟁지역이다. 구글 지도에는 한 때는 팔레스타인이 사라지고 그 전 지역이 이스라엘이라고 뜨기도 하고 또 다시 팔레스타인이란 지명이 뜨기도 한다. 가자지구는 하루가 멀다고 사망사고가 발생한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분리하여 수용한 장벽은 거대한 교도소이다. 예수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 고향으로 여겼던 그 마을은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가버나움이란 마을에 대해 알아보다보니 감독이 왜 이 마을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정했는지 알 것 같다. 기독교 전통에서 성경 상식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고 근래의 분쟁을 잘 알고 있을 서구인들에게 이 제목은 영화의 의미를 너무나 간단하고 강력하게 던져준다.

 

 

   

갈릴리 호수가 보이는 가버나움 회당 근처에 있는 베드로 동상

https://thepreachersword.com/tag/homeless-jesus/

가버나움 성지 초입의 '노숙자 예수' 동상

https://www.pinterest.ca/pin/394627986083383416/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 지도

(위쪽 갈릴리 지방 옆의 작은 호수가 갈릴리 호수다. 그 왼쪽에 가버나움이 보인다)

http://www.localchurch.kr/love/19226

현재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지도(가버나움은 티베리아 위)

http://hdkorean.com/%ED%98%84%EC%9E%AC%EC%9D%98-%ED%8C%94%EB%A0%88%EC%8A%A4%ED%83%80%EC%9D%B8-%EC%A7%80%EB%8F%84/

 

 

실제 영화의 내용은 가버나움이 아닌 레바논 빈민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놀라운 것은 등장인물 중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배우들은 실제 시리아 등의 난민이란 점이다


    

주인공은 12살 레바논 소년 자인(Zain Al Rafeea)이다.

냉소적이고 생기없는 눈빛의 마른 소년 자인은 더럽고 부산스런 거리의 한 가운데서 엄마와 함께 만든 마약 주스를 팔며 밥벌이에 나서고, 덩치 큰 어른의 협박에도 겁없이 대꾸를 한다. 슬리퍼만 신고도 잘 뛴다.

 

영화는 이 소년이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 경위를 쫓아간다. 시작은 법정이다.

몇 살이냐는 판사의 질문에 자인은 옆에 선 부모에게 물으라고 한다.

부모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출생신고 기록도 없이 태어나고 방치된 아이들.

 

부모에게 삶의 의미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윤리나 도덕, 모성애, 정의, 그런 것은 외계의 언어이다. 이들에겐 오로지 생존이란 단어밖에 없다. 그것도 자신들의.

아이가 계속 태어나지만 제 발로 걷고 말을 할 때쯤이면 갖은 집안일과 심부름, 돈벌이를 해야 한다. 심지어 생리를 시작한 11살의 여동생 사하르는 이웃 남자에게 팔려간다. 그러고도 부모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자인은 온 힘을 다해 여동생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부모에게서 탈출한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버스에서 만난 할아버지는 스파이더맨 티셔츠를 입고 있다. 무적의 막강한 힘을 갖고 싶었을까? 그 할아버지를 뒤따르다 간 곳은 놀이공원이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놀이공원의 식당에서 일하는 라힐에게 의탁하게 된다. 그녀 역시 불법체류자로 가짜 신분증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었지만 새로 만들 돈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임금이 제대로 지불될 리가 없다.

불법신분증을 만들어주는 업자는 자꾸 어린 아기를 맡기라고 한다. 어쩌면 장기매매꾼에게 팔아넘기려던 것일까? 애쓰던 그녀는 결국 유치장에 갇힌 몸이 되고 자인은 돌아오지 않는 그녀 대신 그녀의 한 살배기 아기 요나스를 돌봐야하는 신세가 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망치고 부딪쳐봐도 다시 그곳이다. 어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서로를 뜯으먹고 아이들을 부려먹거나 팔아넘긴다. 먹을 것도 씻을 곳도 마실 물도 없다. 결국 자인은 요나스를 외국으로 보내달라며 맡기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여동생 사하르가 임신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칼을 들고 달려나간다.

 

이제 다시 교도소. 그리고 법정이다.

자인은 살인죄로 수감된 소년교도소에서 부모를 고소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나의 죄가 아니다. 부모가 나를 낳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법정에서 부모는 판사에게 절규한다. 당신들이 빈곤을 아느냐고.

그들의 삶은 충분히 불쌍하고 미안하고 분노할 상황이지만, 그러나 자인 옆에서 변명이 되지 못한다.

판사가 묻는다. 자인, 너는 부모에게 어떤 벌을 내기릴 원하느냐?

자인은 대답한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말라고. 엄마의 뱃속에 있는 저 아이가 태어나면 또 다시 나나 사하르같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를 태어나게 하지 말아달라고.

 


 

 

 

주인공인 자인은 실제 베이루트에서 배달 일을 하던 시리아 출신 난민이라고 한다. 가출한 자인을 잠시 돌봐주었던 라힐은 실제로 불법체류자로 촬영 도중 수감되어 빼내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자인의 여동생 사하르와 거리의 소녀, 그리고 아기 요나스도 실제 난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연기한 것이었다.

그래서 감독은 각본에 거의 대사가 없었다고 한다. 상황만 주면 등장인물들이 그냥 대사와 행동을 해나갔다고 한다. 영화는 그들의 평소 삶이었다. 거의 다큐라고 할 수 있다. 

 

영화 공개 후 자인은 유엔난민기구 도움으로 가족과 함께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사하르 역의 소녀와 거리의 소녀 또한 유니세프 지원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영화 `가버나움(감독 나딘 라바키라는 여성)`은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였으며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데 이어서 제72회 영국 아카데미, 91회 미국 아카데미와 제76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에서 자인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른척하고 외면하고 경멸하고 혐오하는 극빈층의 삶.

위험하다고 여기고 경계하며 교화시켜려 하는 거리의 아이들.

듣고도 잊고 뉴스도 읽지 않는 먼 나라 난민들의 모습도 본다.

어쩌면 우리 부모들이 어려서 겪었던, 전쟁 통에 겪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까.

자인이 보여준 동생에 대한 모습, 아기 요나스를 돌보는 모습, 도둑질을 해서라도 살아내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목구멍에 무엇이 울컥 치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 안의 인간다움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무력하다.

분노하고 혐오하고 눈물을 흘릴 뿐.

약간의 후원금과 봉사활동이 세상의 악을 청소할 수 있을까.

법과 제도가 불평등과 욕망을 통제하게 할 수 있을까.

 


 

마태 효과(Matthew Effect)’란 말이 있다고 한다.

성경의 마태복음 중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없는 자는 더 빼앗길 것이다라는 내용에서 나온 비유로 부자는 더 강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말로 비유되기도 한다. 또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인자로 인해 아이가 자라면서 어떤 상황과 관계들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아이의 양육효과를 강화시켜서 좋은 것은 더 좋게, 나쁜 점은 더 나쁘게 강화되는 것을 말한다.

불평등과 악은 인간세상의 필요조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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